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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이 Apr 12. 2023

4일차 - 피엔차, 몬탈치노

여행이 무서운 아이의 이태리 여행기 (5)

발사믹 식초 30년산을 살까말까 하다가 소화에 좋다고 하길래 사는 걸 결심했었다. 친구의 30가지 지병 중 가장 심각한 게 소화를 잘 못 시키고 변비가 심한 거라서, 먹이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샀더랬다. 그런데 친구는 그 발사믹을 입맛에 안 맞아 했고, 먹을만하다며 시범으로 나만 많이 먹다가, 궂이 여기서 더 소화가 잘 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다섯번 정도 들 정도로 소화가 잘 되고 있다. 하여간 궂이 이태리까지 와서, 이 정도면 내 인생에서 소화 활동이 가장 왕성하다 싶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날 몬테풀치아노의 전망과 중세도시 느낌에 꽤나 만족했던 우리는, 토스카나의 도시들이 약간은 느낌이 겹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 성당, 성벽, 돌길, 아기자기한 가게들이라는 느낌은 비슷할 것 같고, 유일하게 맑은 날에 이미 충분히 좋은 전망을 즐겼으니, 더 좋은 전망은 앞으로 없을 것 같았다. 걱정을 좀 하다가, 일단 넷째날 피엔차, 몬탈치노는 계획대로 움직이고, 다음날 시에나, 산지미냐노에서 산지미냐노는 취소를 하고, 느낌이 조금은 다를 것 같은 시에나에서 패스를 끊어서 좀 더 충분히 돌아다니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조식을 주지 않는 숙소라서 약간 일찍 집에서 나섰는데, 피엔차 가는 길이 심상치 않았다. 햇빛이 쨍하니 비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막 대놓고 흐리지는 않은 날씨였는데, 가는 길에 눈이 꽤나 호강을 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뛰어놀 것 같은 파란 풀밭에, 멀리 호수가 수묵화처럼 보여서 동서양의 경치가 한눈에 보였다. (날이 약간은 흐려서 사진은 이 때 받은 좋은 느낌을 담아내지 못했다.)


중간중간 포토스팟에서 차를 멈추고 우와우와 하다가, 피엔차 주차장에 도착했다.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하얀색 무료 주차 공간에서 마지막 빈 자리를 하나 발견해서, 기분 좋게 주차에 성공했다.


어제 "이 전망이 우리 토스카나 여행의 최고의 전망일거야" 라고 생각한 건 몹시 섣부른 판단이었다. 날씨고 뭐고 1등은 그냥 피엔차였다. 성벽에서 보는 넓은 보리밭들도 멋있었고, 건물마다 걸린 빨래들마저 멋스러웠고, 동네에서 만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모두 영화배우인 듯 너무 멋있었다.


아직 가게들이 점심 식사를 시작하지 않은 시각, 성당 맞은편 Bar 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팔고 있어서, 마침맞게 브런치를 즐겼다. 전날 아메리칸 커피를 먹은 촌스러운 아이가 된 것에 충격을 받은 내 친구는 나를 따라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관광지라서 좀 비쌀만도 한데, 오히려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커피도 샌드위치도 저렴하고 맛있었다.


성당은 따로 입장료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입장이 무료라서 그런지 내 친구는 연신 "홀리하다" 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입장료를 좀이라도 냈으면, 홀리는 커녕 시무룩했을 것이 분명하다. 성당 내부에 들어갔을 때, 뭔가 마음이 우루루 녹아내리고, 향기마저 성스럽던 곳들이 있었는데, 아직 이번 여행에서 그런 경험은 안타깝게도 하지 못했다.


교회 뒤편 전망 좋은 성벽길과 입장이 무료이던 성당

                    

어디든 다 좋았던 거리


피엔차를 나와서, 토스카나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발도르차 평원" 이라는 곳을 가려고 했다. 친구의 핸드폰에서 찾은 발도르차 평원으로 가는데 경치는 좋았지만 뭔가 주차하고 걸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라서 포기하고, 내 핸드폰으로 찾은 발도르차 평원은 당당히 ZTL (진입 금지 구역) 로 들어가려고 해서 포기했다. 내 친구는 사이프러스 나무만 보면 여기가 발도르차 평원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발도르차 평원은 어딘가 딱 정해진 장소가 아닌 모양이다.)


어쨌건 주변 풍경이 너무 좋아서, 그냥 아무데나 주차했다. 친구가 "인생 최고의 풍경 중 하나" 라고 말할 정도로, "아 여기가 토스카나야" 라고 자랑할 수 있는 그런 풍경들이었다. 잠깐 차를 대놓고 여기저기 한참 걷기도 하고, 길 잃은 척 아무 샛길로 들어가서 연신 탄성을 내뱉으며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글래디에이터를 재밌게 본 사람들은 꼭 찾아간다는 막시무스의 집이 있다. 개인적으로 글래디에이터를 안 봐서 젖을 감회가 없는데다, 사진으로 보기에 "가짜 막시무스의 집" 이 진짜보다 더 멋있어서 가짜를 찾아갔다. 가짜 막시무스의 집이라는 장소 자체보다도, 그 곳을 찾아가는 길의 풍경이 너무 좋아서, 나눈 대화라고는 "우와"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가끔 유채꽃이 가득 핀 노란 풀밭도 있었는데, 그걸 보고 친구가 대학교 입학할 때 건강검진 받다가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30초간 의식을 잃었는데 그 때 "저런" 꽃밭을 보고 기분 좋게 가다가 누가 뒤에서 불러서 뒤를 돌아봐서 깨어났다는, 죽는다는 건 꽃밭을 거니는 것인가 싶어서 무서운 생각이 덜 든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게 주어 동사가 들어간 유일한 대화였던 것 같다.



햇빛이 쨍하진 않아서 사진이 실물보다 더 잘 나온 건 없는 것 같다


가끔은 경주 왕릉 10배쯤 되는 느낌이 옆에 펼쳐지기도 하고, 노란꽃이 색다른 눈호강을 시켜주기도 한다


몬탈치노는 보통의 중세 도시국가와는 달랐다. 그냥 관광지 같은 느낌이랄까? 성벽의 산책로는 어느 도시보다도 길고 좋았지만, 광장이라고 할만한게 따로 있지는 않은 듯 했고, 골목이나 상점들도 시골 도시라기 보다는 그냥 좀 관광지 같았다. 피엔차의 공중 화장실은 동전을 받는 작은 바구니가 놓여져 있다면, 몬탈치노는 기계에 동전을 넣어야만 하는 느낌의 차이랄까?


원래 몬탈치노로 간 목적이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라는 와인을 사기 위해서라서, 2시간을 예상하고 미리 낸 주차비가 아깝기는 했지만, 와인 하나 사서 오늘의 관광 일정을 마무리했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그냥 마트에서도 판다. 1-2유로 정도 마트가 더 비싼 듯하다.) 집에 오자마자 친구가 와인을 따 먹더니, 겁나 맛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구글 내비가 몬탈치노를 빠져나와서 => 10분을 운전해서 => 다시 몬탈치노를 지나서 => 숙소로 가는 놀라운 루트를 안내했지만, 풍경이 계속 너무 예뻐서 너그럽게 용서했다.


이태리 마트에서 싸게 파는 한치를 사서, 고추장 고추가루 설탕 때려박은 오징어볶음으로 간단히 저녁을 만들고, 친구가 가기 전에 "이태리 가면 꼭 먹어야 한다. 매일 먹어라" 고 주장하던 브라타 치즈도 사서, 이 정도라면... 매일 먹는 건 오버아닌가?! 란 생각을 살짝 하며, 방울토마토에 곁들여 나쁘지 않은 식사를 마쳤다.


첫날 로마에서 짐싸서 나올 때 나의 우당탕탕을 옆에서 관찰하던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짐싸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데, 딱히 짐을 잘 싸는 건 아니고, 넣었다가 뺐다가 다시 넣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이가 먹으면서 기억력이 딸리기 시작하면서 생긴 문제인 듯하다. 가령 여권을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가, 앞주머니는 위험한가 싶어서 뒷주머니에 넣었다가, 뒷주머니에 넣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여기저기 한참 뒤지다가 겨우 찾아내서, 역시 찾기 쉬운 앞주머니에 넣어야겠다 하고 앞주머니에 다시 넣는 그런 일을 여러가지 물건으로 반복하는 모양이다.


내일은 3일밤을 함께한 좋았던 토스카나 숙소를 떠나서 시에나 구경을 하고 피렌체로 들어간다. 피렌체 일정이 빡빡해서 조금 일찍 호텔에 도착해서 체력 충전을 해야할 것 같은데, 관건은 역시 내가 짐을 얼마나 빨리 싸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래서 내일은 짐을 싼다기 보다, 눈앞에 보이는 걸 다 때려넣을 생각이긴 하지만... 혹시 몰라서 오늘의 집필활동은 자기 전에 이렇게 끝을 내어 두기로 했다. 흐흐.


좋았다...는 건 항상 상대적이다. 좋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좋으면 더 좋기 마련이다. 오늘은 좋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하루라서 더더욱 그런것 같은데, 구글포토에 잔뜩 들어간 사진들을 보며, 내가 저걸 쌩눈으로 봤다는 게 신기하고, 저 사진보다 쌩눈으로 본 게 훨씬 예뻤다는 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았다를 좋았다고 쓰는데 충분치 않은 것 같아서 계속 주저리주저리 글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머... 어쩔 수 없다. 눈호강했다. 좋았다. 끝.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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