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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이 Apr 13. 2023

5일차 - 시에나

여행이 무서운 아이의 이태리 여행기 (6)

원래 오늘은 매우 여유로워야 했다. 시에나와 산지미냐노 2군데를 둘러보려던 계획을, 시에나만 둘러보는 걸로 바꿨고, 집에서 일찍 나서서, 시에나를 여유롭게 둘러보고, 밥 먹고, 피렌체 외곽으로 잡은 숙소로 이동이라는 이 아름다운 계획이 완벽하지 않을 이유 따위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우리팀에서 일 젤 잘 하는 아이 둘이서 서버 개발하고 프론트 개발하는데, 2주를 일정 버퍼로 잡은 계획표를 보는 기분이었달까. 그러나 하나 간과한 것이 피렌체의 퇴근 시간이었고, 길 한번 잘못 들었다가, 식은땀 잔뜩 나는 아슬아슬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아직 열린 결말을 유지하고 있다. 


다시 시간을 돌려, 평화로웠던 아침으로. 


시에나 관광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날 이것저것 찾아 보았다. "오파시파스" 라고 발음하는 "OPA SI PASS" 를 끊어서 성당 내부 4곳을 입장 해서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는 13유로짜리 통합권을 사는게 가장 괜찮아 보였다.


어디서 티켓을 살까 하고 봤더니, 15-19유로까지 가격이 나갔다. 꽤나 어리둥절했는데, 시스템이 이런 것이었다. 원래는 13유로다. 그런데 미리 온라인으로 티켓을 사면, Ticket office 에서 줄을 안 서도 되니까, 예약금 같은 개념이 붙어서 오히려 더 비싸지는 거다. 티켓을 온라인으로 사려고 째려보던 내 친구가, "이거 아무래도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아" 라고 하면서 전격적으로 현장 구매를 결정했다. 


어제 마트에서 장봐온 걸로 나름의 조식을 차렸다. 크로아상, 샐러드, 소세지, 브라타 치즈, 스크램블 에그를 늘어 놓고, 첫날 호텔에서 야무지게 챙겨온 버터에, 커피 기계 사용법을 완전히 익힌 친구가 손수 만든 카푸치노까지 배치하니, 보기에도 먹기에도 매우 그럴싸한 한상이 되었다. 한국에서 챙겨간 조미김 1봉도 곁들였는데, 스크램블 에그를 싸 먹으니, 보기엔 그래도 먹기엔 좋았다. 


정들었던 숙소와의 작별. 얼굴로 친절을 완성한 숙소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고 온 친구는 저러다 입가에 주름생기겠다 싶을 정도로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하루밤 자고 다시 봤더니 또 보면서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토스카나의 풍경을 보면서 시에나로 출발했다. 


알쓸신잡을 보고 가장 강렬하게 남았던 장면이 도시건축가 김진애가 캄포 광장을 보여주면서, 이 곳을 즐기는 방법은 털썩 주저 앉아서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라고 한 부분이었다. 평소 멍때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꼭 한번 해 보고 싶다는 로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시에나는 주차를 도시 외곽에 한 후 내부로 들어가는데, 이 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게 된다. 처음엔 상상이 안 갔는데, 막상 주차하고 보니, 에스컬레이터 마크도 잘 보이고, 뭔가 자연스러웠다. 슬슬 무릎이 맛이 가서, 파스 없이는 편안하게 자기 힘들어졌고, 파스붙인 자리에 피부병같은게 생겨서, 이제는 파스를 붙이는 것도 힘들어지는 시간이 오고 있는데, 시에나의 에스컬레이터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가 절로나오는 아름다운 기술의 조화였다. 


시에나는 끝판왕이다. 이제까지 본 모든 도시 국가들의 대장 같은 느낌이다. 작은 아이들을 다 보고, 시에나를 마지막으로 보는 선택은 매우 좋은 루트인 것 같다. 시에나를 먼저 보면, 가장 마지막에 보는 것보다 왠지 감동이 적을 것 같다. 게임을 하더라도 Stage 를 몇개 깨고 보스를 만나야지, 보스먼저 만나고 Stage 를 깨면, 보스에 대한 감흥이 적지 않은가... 


친구의 예상대로 Ticket office 의 줄은 거의 없었다. 선견지명 덕에 예약비를 아꼈다. 표를 끊으면 오디오북을 무료로 준다. 근데, 한국어는 없어서, 그냥 친구한테 잘 들어줘 하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성당 내부. 아. 드디어 Holy 한 느낌이 드는 성당을 만났다. 그 동안 봤던 여러 성당들 (특히 오르비에토 성당) 은 외관은 그래도 wow 가 있는 편이었으나, 내부로 들어가면 (입장료가 무료가 아닌이상) 홀리한 느낌이 들지 않았었는데, 시에나 대성당은 가슴으로 밀려오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 


특히 미켈란젤로가 4개만 조각하고 도망갔다는 제단이 있는데, 유명하다는 미술가는 "유명하다고 하니까 유명한거지, 왜 유명한지 난 알 수 없다" 라고 생각하며 살던 나에게 약간 충격을 줬다. 그냥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었달까. 같은 살랑살랑 춤을 춰도, 정말 춤을 잘 추는 사람은 그 살랑살랑에서 엄청난 간지가 나오지 않나... 그런 느낌이었다. 조각이 주는 생동감이 뭔가 달랐다. 피콜로미니 도서관의 프레스코화는 듣던대로 화려하고 멋있었고, 역대 교황들과 선지자들의 조각상들이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신기했다. 전체적으로 교황을 여기저기 굉장히 크게 배치한 건 신선했다. 모든 신을 믿던 로마가, 유일 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로 바꾸면서, 권위를 지켜내기 위해서 교황을 인간중에 최고로 신격화시키려고 했다는 걸 읽었었는데 그런 느낌이 왔다고 할까... 


내 친구는 오디오북 때문에 고생을 했다. 오디오북의 #3 가 무슨 선지자의 대리석 바닥 장식 설명이었는데, 그 장식을 못 찾아서, 온 성당을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찾아 헤매었다. 결국은 찾는데 실패하고, 우리의 결론은 "저기 천으로 덮어둔 바닥이 그것이다" 였다. 하여간 시간을 꽤나 보냈고, "머라는지 잘 모르겠는데, 유명한 사람이래" 만 20번 얘기한 친구의 오디오북 동시통역은 애쓴 보람이 느껴지지 않아서 미안했다. 


골목길, 그리고 대성당


성당 제단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 (아래 4개) 과 피콜로미니 도서관


가기 전에 여기저기서 주섬주섬 본 정보 중에 젤 유용했던 게 2개가 있는데, 1) 오페라 박물관 티켓 검사하는 곳에 무료 화장실이 있다. 2) 오페라 박물관 3층에 사람들이 줄 서 있는데 거기가 파노라마 라고 전망대 가는 줄이다. 였다. 특히 1)번은 매우 유용한 정보였다. 막상 들어갈 때 화장실 마크가 보이지 않았는데 "있다고 했다" 는 믿음을 바탕으로, 급한 마음에 영어가 방언처럼 터져서, 무사히 잘 찾아갔다. 


걱정과 달리 파노라마 전망대로 가는 줄은 금방 찾을 수 있었고 (입구에서는 4층으로 안내를 했는데 그냥 꼭대기 층이고 사람들 줄이 있기 때문에 찾는게 어렵지 않다.), 좁은 계단 70개쯤 올라가서 경치를 보고, 또 70개쯤 올라가서 더 높은 경치를 봤다. 위가 좁아서, 사람들이 보고 내려오면 다음 사람들을 올려보내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은 꽤나 길다. 나는 나한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파리 에펠탑에서 처음 알았다. 같이 간 회사 사람이 본인은 에펠탑을 가본적 있으니, 혼자 다녀오라며 나를 보냈는데, 그 때 혼자 올라가서 벌벌 떨려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가 없는 나를 발견하고, 꽤 비싼 돈을 내고, 꽤 오래 기다려서 (그 때 에펠탑 올라가는 줄이 엄청 길었음), 고소공포증이 나한테 있다는 걸 알게 됐었다. 그런데 이게 점점 나이 먹을 수록 심해지는 느낌이다.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높은 곳에서는 아예 시선을 어떻게 두지를 못하겠다. (내일 쿠폴라라고 불리는 피렌체 두오모를 예약은 해 뒀는데... 아무래도 포기하는게 맞으려나 싶기도 하다.) 하여간, 140개 계단을 올라가서 보는 풍경은 아주 높은 것도 아닌데다, 아래 지붕들이 약간 안전하게 받쳐주는 느낌도 있고, 멀리 볼 수 있는 풍경도 있어서, 숨 넘어갈듯이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계단 올라가는 길이 너무 좁아서 그 길이 좀 무서웠다. 앞에 어린 아이들이 내 앞에 있었는데 도저히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ㅠ.ㅠ 


분명히 오페라 박물관에 시에나가 사랑한 화가 두치오의 작품이 2층에 전시되었다고 했는데 본 기억이 없어서 다시 올라갔다. 온도/습도를 관리 중인지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몰라서 지나친 거였다. 아무튼, 두치오를 시에나가 너무 사랑해서, 그림을 성당으로 가져올 때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와서 맞이했다는데... 난 머 시에나 시민은 아니니까...ㅎㅎ


파노라마에서 보이는 풍경. 교회 꼭대기에 달린 시에나 문양의 풍향계가 귀엽다.


드디어 캄포 광장. 종치는 아이가 게을러서 10분씩 늦게 종을 쳐서 "게으른 종"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잘생기게 우뚝 솟은 만자이의 탑이나, 탑 옆에 늠름하고 멋있게 있는 시청 건물이나, 조개 껍데기 모양에 경사진 광장이나 다 좋은데... 이 광장의 완성은 사람인 것 같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앉아서 다양하게 시간을 즐긴다. (누워 있으면 경찰이 와서 앉으라고 하는 듯 했다. 어떤 기준인지 잘 모르겠다.) 이 사람들이 섞인 풍경을 보는게 너무 좋았다. 이태리 내에서 수학여행 온 듯한 애기들도 많고, 나도 저 나이 때 또 여기 올 수 있을까 싶은 예순이 훌쩍 넘어 보이는 할머니들도 많고, 영어를 쓰는 관광객들도 많고... 이 다채로운 어우러짐을 보는 것도, 그 안에 나 또한 하나의 다채로움이 되는 것도, 모두 너무 좋았다. 


캄포 광장


원래 시에나에서는 고급진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먹어보자고 예약을 했더랬다. 근데 일주일 전에 갑자기 수요일은 휴무라는 연락이 덜렁 왔다. 대신에 산지미냐노의 식당을 하나 찾아놨는데, 여행 계획이 바뀌면서, 급하게 다시 식당하나를 고르고, 점심 시간이 3시까지라길래 2시 30분에 식당으로 갔다. 근데 마감이라고 해서 못 들어갔다. ㅠ.ㅠ 대부분 식당이 문닫을 시간이라서 급한 마음에 맞은 편 중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일요일 저녁에 숙소 옆 식당에 간 것 말고는 이태리에 와서 이태리 식당을 간 적이 없어서, 친구는 조금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해산물을 좋아하는데, 해산물 요리가 없다시피한 토스카나의 이태리 식당에 그리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미안한 마음이 좀 들었다. 


유럽의 중국 식당은 나에게는 꽤나 짙은 로망이다. 출장을 가면, 일단 주변에 중국 식당을 찾아서, 볶음밥에 마파두부를 시켜서 먹어보고 맛있으면, 그냥 "너로 정했다" 느낌으로 주구장창 거기만 갔었다. "중국집은 유럽에 있는 중국집이 젤 맛있는 것 같아" 가 어렸을 때 종종 말하고 다니던 독특한 기억이었고, 그 기억과 만나는 감성 넘치는 시간이었다. 감성이 폭발할 뻔 했는데, 시킨 요리들이 다소 너무 짜서, 감성은 빠르게 진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캄포광장을 다시 보고, 대성당과도 작별을 한 후, 무사히 주차 정산까지 잘 하고 피렌체로 출발. 피렌체는 ZTL 이라는 진입하면 비싼 벌금을 내야 하는 진입금지구간이 유난히 많고 운전도 험해서 안전하게 외곽의 숙소를 예약했다. 4시 30분쯤 시에나에서 출발해서 구글지도가 6시쯤 도착하겠다고 할 때까지 평화로웠다. 그런데 퇴근시간인지 점점 도착 시간이 멀어졌다. 구글이 "더 빠른 길을 찾았어. 그 길로 갈래?" 라고 물어보면, ZTL 이 뭔지 모르는 구글이 도심으로 안내할 것 같아서 싫다/싫다 하면서 운전을 해 나갔다. 근데 중간에 차선을 못 바꿔서 길을 잘못 들었더니, 뭔가 도심 쪽으로 향해 가기 시작했다. 온갖 방향에 동그란 ZTL 마크가 보이고, 아 어쩌란 말이냐... 란 말이 몇번이나 튀어나왔다. 나름대로는 다 피해서 온 것 같긴 하고, 지나온 길에 미켈란젤로 광장에 있다는 다빈치 석상이 보였는데, 이 쪽은 ZTL 이 아니라고 하니... 그래도 머 이제와서 어쩔 것인가. 친구말대로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에 숙소 들어오는 길에 한번만 딱 좌회전을 하면 되는데 거기에도 빨간 ZTL 마크가 있었다. 그 마크 아래에는 특이하게 버스와 트럭 그림이 있어서, 버스와 트럭만 된다는 건지, 안 된다는 건지 몰라서, 숙소에 못 들어가고 외진 곳에 차를 멈추고, 한참 표지판 읽는 법 검색하다가 실패하고 숙소에 연락을 했더니, ZTL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겨우 집으로 들어왔다. 뭔가 오랜 시간 극도의 긴장을 해서 어깨도 아프고 다리도 후들거리고. 


트럭만 된다는 건지 트럭만 안 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던 녀석


여기 숙소 주인 아저씨는 말하는 걸 너무너무너무 좋아해서, 질문을 끝까지 듣지 않고 하고 싶은 얘기를 10분씩 해서, 알고 싶은 걸 알아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긴장도 좀 풀었다. 코로나 전에는 한국 손님들 많았는데 코로나 이후 첫번째 한국 손님이라고 무척 좋아하셨다. 


ZTL 벌금이 몇번이나 나오게 될까도 이번여행에 대단한 관전포인트가 될 것 같다. 렌트카 반납할 때 벌금이 없다고 하면 아마 돌아오는 길이 몹시나 기쁠 것 같은데. 그래도 위험한 순간도 없지 않았는데, 베스트 드라이버인 친구의 안전 운전과, 운전 거칠게 한다는 이태리 국민들의 양보와 친절도 받아가며 안 다치고 무사히 잘 도착했으니,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기쁘게 귀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내일 두오모는 어떡하지... ㅠ.ㅠ 후기 쓰다보니 더 무서워지네... ㅠ.ㅠ 높은 거 무서워해, 좁은 거 무서워해, 술 못 먹어, 운전 못해. 아... 뭔가 하나님이 나를 만들 때 인간은 평균적으로 여행을 좋아하고 모험을 즐긴다는 걸 잊어버린 게 분명하다. 사소한 일을 걱정하고 대비하는 성격 덕에 (힘들긴 해도) 일은 나름 잘 하는 것 같은데, 사는 건 참 쉽지 않구나. 이런 나를 친구라고 열심히 데리고 다니는 내 친구에게 감사하며. 


내일도 말 잘 들어야지. (근데 내일은 투어라 새벽에 나가야 하는데 너무 시간이 늦었네.. 이미 망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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