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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이 Apr 14. 2023

6일차 - 피렌체

여행이 무서운 아이의 이태리 여행기 (7)

오늘은 피렌체. 오전에는 유로 자전거 나라라는 아는 사람이 추천해준 가이드 투어를 하기로 되어 있고, 오후에는 미리 끊어둔 브루넬레스키 패스로 여기저기 입장한 후, 마지막에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석양을 본다... 는 일정이었다. 출발은 산뜻하고 좋았으나, 이 일정은 결국 "과욕이 부른 대참사"로 귀결되었다.


전날 여행기 쓰다가 2시에 잠들었는데, 5시에 잠을 깼다. 친구는 12시에 자기 시작했는데 3시에 잠을 깼다고 한다. 달랑 3시간 자고 긴 하루를 시작해야 하니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그래도 기적의 명약 비타민 B 가 우리를 지켜줄 거라 믿고, 숙소 아저씨가 일찍 나서는 우리를 위해 전날 챙겨준 빵과 야채주스를 꾸역꾸역 먹고, 8시까지 시뇨리아 광장을 가기 위해 6시 55분 집에서 나섰다.


출발 전 전격적으로, 두오모 쿠폴라 등반은 취소하였다. 올라가서 무서운 건 안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올라가는 길이 고소공포증이 있으면 너무 힘들다는 글들을 보고 안 되겠다 싶었다. 조토의 종탑을 오르는 건 두오모에 비해서 중간 중간 쉬는 곳도 많고, 철창이 경치를 보는데는 불편하지만, 공포심에는 안도감을 주기 때문에, 훨씬 해볼만 하다는 글들이 있어서 돈이 좀 아깝지만 간다면 조토의 종탑을 가기로 변경하였다. 조토의 종탑은 쿠폴라보다 더 싼 가격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이 좀 아깝기도 하고, 소싯적에 스카이다이빙까지 즐기던 친구에게 철창에 가로막힌 경치를 보게 한다는 게 좀 미안하기도 했다. ㅠ.ㅠ


20분 정도 트램을 타고, 30분 정도 걷는 여정이었다. 트램 표를 사는 기계가 묘하게 1-2초씩 버퍼링이 있어서 찰나의 당황이 있었으나, 큰 문제 없이 무사히 약속 장소에 1등으로 도착했다.


사실 가이드 투어는 경험도 없고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유경험자가, 피렌체는 줄 서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가이드 투어를 하지 않으면 줄 서다가 하루가 다 간다고 꼭 투어를 해야 한다고 했다. 피렌체 처음이라 어디갈지도 잘 모르는데, 나쁠 것 없겠다 싶어서 신청을 했고,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투어는 나의 모든 상상과 달랐다. 나는, 약간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가령 우피치 미술관에 가면, 1층 가서 이거 꼭 보시고, 2층 가서 저거 꼭 보시고, 1시간 후에 여기서 만나요~ 같은 느낌. 가이드가 말하는 시간 30분, 내가 돌아다니는 시간 4시간? 그런데 가이드가 말하는 시간이 4시간 15분이고, "좀 있다 여기서 만나요" 는 15분밖에 없었다.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보면, "왜 쟤네는 여기까지 와서 멍하니 서서 설명만 듣고 있지?" 라고 한심하게 보일 수는 있는데, 그 설명이 상상 이상으로 훨씬 정말 재밌다.


가령, 조토의 종탑을 만들던 시기는 흑사병이 창궐하던 때라, 1/2층은 조토가 만들다가 죽었고, 3/4층은 조토 제자가 만들다가 죽었고, 나머지는 두오모 만들던 애한테 니가 여기 마저 만들어라고 해서 성당과 같은 스타일로 만들게 되었다는 설명을, 알고서 보니 층마다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종탑을 보면서 설명을 듣는게, 엄청 큰 즐거움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전국제천 중계를 하면 멍하니 보고 있는게 낙이었을 정도로 스포츠중계 보는 걸 좋아한다. 스포츠 경기를 재밌게 보려면 룰을 알아야 한다. 대표적인게 컬링인데, 컬링의 묘미는 "영미야" 하고 소리지르는 게 아니라, 원 안에 내 스톤을 많이 남기기 위한 지략 싸움인데, 이걸 알고 보면 재밌지만, 모르고 보면, 도대체 왜 좋다고 하는지, 왜 괜찮다 (= 망했어요) 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약간 그런 기분이었다. 조토의 종탑이라는 스포츠 중계를 보는데, 가이드가 이 스포츠의 룰을 설명해 주는 느낌. 일단 설명 자체가 너무 재밌고, "이걸 몰랐으면 이 아이가 얼마나 밋밋하게 보였을까" 싶어서 너무 고마운 느낌.


가이드분이 이태리에 유학와서 현재의 이태리인 남편을 만나 17년째 거주중이라는데, 아마도 이런 쪽의 미술사를 전공 하신 듯 했다. 보통 설명이 쉬우려면, 아는게 엄청 많아서 쉬운것만 골라줄 수 있어야 하는데, 나한테는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호불호는 있을 수 있겠다 싶다. 미술관 같은데 가서 그냥 내가 느끼는대로 보는게 좋은 사람들은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서 있으라는 곳에 서 있어야 하지" 라는 현타가 올 수 있다. 나처럼 유명한 작품들이 왜 유명한 건지 궁금한데 전혀 알 수가 없었다면 굉장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수요일이라서 그런지 우피치 미술관에 사람이 많지 않아서, 유명한 그림도 굉장히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알기 전엔 성모마리아, 알고 나서는 가족 사진. 보티첼리의 봄 안의 꽃. 조토의 종탑.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절정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는 피자 가게를 하나 봐둔게 있었는데, 격식있는 레스토랑이 30% 할인을 한다고 하여 가게 되었다. 피렌체는 티본스테이크가 유명하지만 양이 너무 많아서 안심스테이크에 까르보나라를 주문했다. 방송에도 나왔던 식당이라 한국사람이 많이 오는지 한국어 메뉴에 한국인 Staff 이 서빙을 하는 것도 "한국 사람들 타겟하는 식당은 가지 말라고 했는데" 라는 불안감 보다는, 편안함이 더 커서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다.


나에게 이태리는 "아무 식당에 가서 아무 스파게티나 시켜도 너무 맛있는 곳" 이었다. 실제로 베니스에 출장 갔었을 때, 아무 식당에 가서, 평소 먹는 해산물 스파게티가 없어서 그냥 아무거나 시켰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이태리에서 먹은 그 수많은 스파게티 중 맛이 없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근데 하필  물값이 10유로고, 자리세가 1인당 5유로인, 비싼 식당에서 나온 스파게티가 입맛에 맞지 않았다. ㅠㅠ


피렌체가 트러플이 유명하다고 해서 트러플 안심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트러플 향이 전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얘는 그냥저냥 먹을만했다. 스테이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정말 맛있는 스테이크" 말고는 구분할 줄 모르는데, "정말 맛있는" 은 아니었지만, 질기거나 퍽퍽하지 않았다.


엄청나게 좋았던 기분이 입맛에 맞지 않는 식사로 가라앉고 다시 두오모로 왔다. 수학여행 온 아이들과 관광객들로 두오모 앞은 굉장히 붐볐다.


어제의 나에게 오늘 내가 해 주고 싶은 말들이 있다.


"두오모로 입장하는 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길어질 수 있어. 줄이 확 짧아질 때가 올테니 줄 너무 길면 줄 서지마"

"혹시 줄이 안 짧아지면, 그냥 안 들어가도 돼. 내부는 시에나 성당과 달라. Holy 하지 않아"


오늘의 내가 전하는 말을 못 들었던 어제의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엄청 길어진 우선입장줄에서 장장 1시간 기다려 들어갔으나, 실망만 가득 안고 돌아섰다.


그나마 두오모 박물관은 괜찮았다. 성당 옆에 박물관은, 진품을 따로 모아두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미켈란 젤로가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천국으로 가는 문이 있다면 이럴 것 같다" 고 말했다고 해서 "천국의 문" 이라고 하는 금세공 작품의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3층 테라스로 가면 두오모의 돔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게 좀 이상하다. 돔은 멀리서 보면 뽈록 튀어 나온게 엄청 귀여운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엄청 지저분하고 이상했다. 마치 보여주지 않고 싶은 모습을 내가 보는 기분이라서 그냥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상황 봐서 조토의 종탑을 가자고 했었다. 그런데 점심 식사 이후 본 것들이 대부분 실망스러워서 꼭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침 줄도 꽤나 짧아져서 30분쯤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403 계단, 중간에 3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올라가서 대부분의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 몸을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공간에 몸을 정지시키고 천천히 눈동자만 움직여서 볼 수 있는 곳들만 봤다. 친구에게 경치가 어떠냐고 물었더니, 시에나 전망대는 멀리 푸른 산이 보여서 좋았는데, 여기는 빽빽히 건물이라 감흥이 덜하다고 했다. 사진은 철창 사이로 찍어서 그럴싸하지만, 실제로는 철창이 눈앞에 있어서 감흥이 떨어졌을지도 몰라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종탑에서 (나는 본 기억이 없으나) 친구가 본 풍경


몇일간의 여행으로 이미 다리가 맛이 간 상태라, 계단을 내려오는 건 간단하지 않았다. 한칸씩한칸씩 찬찬히 내려와서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친구도 나를 몹시 자랑스러워 했다.


어제 길을 잘못 들어서 미켈란젤로 광장을 운전하며 스쳐지나갔었다. 스쳐지나갔지만, 해가 지기 전 저녁의 그곳 풍경이 너무 좋아서, "저기는 꼭 가야한다" 라고 생각하게 됐다. 쟤는 뭐지 싶은 오래되고 예쁜 건물들, 도시 곳곳의 조각상들을 지나, 멀리서 보면 예쁘고, 가까이서 보면 사람이 많던 베키오 다리를 건너, 꾸역꾸역 1시간 가까이 걸어서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했다.


구름이 많아서, 흔히 기대하는 아름다운 석양은 아니었지만, 뽈록 튀어나온 귀여운 두오모, 시청건물, 아르보강, 베키오 다리, 예쁜 구름... 아..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감상하기에는 다리가 너무 아팠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해가 넘어갈 때쯤, 우리의 여행은 이제 극기훈련으로 변했다. 생각해 보면, 시에나에서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에 잔뜩 긴장하고 잘 못 잔 상태로,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중간에 점심 먹을 때 빼고는 거의 계속 서 있었다.


미켈란젤로 광장


트램을 타기 위해 다시 30분을 걸어야 했다. 트램에서 내리면 또 10분 남짓 걸어야 하고. 겨우겨우 기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1층은 주방 거실, 2층은 방이 있는 구조인데, 어째서 2층이 방인거냐고 울면서 기어서 방으로 올라갔다. 한국서 가져간 오징어짬뽕을 하나 끓여서 저녁으로 나눠먹었는데, 점심에 먹은 트러플 안심 스테이크 보다 훨씬 더 맛있었고, 과연 내일은 걸을 수나 있나 걱정하며 이렇게 하루가 끝났다.


피렌체 투어는 좋았지만, 나머지는 뭔가 제대로 못 즐긴 것 같다. 이제까지는 여행기 쓰면서 사실 굉장히 신나고 재밌었는데, 피렌체는 쓰는 나도 별로 재밌지가 않다. 이렇게 했었어야 한다는 정답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워낙 강렬하게 힘들었으니 나중에는 더 진한 추억이 되려나.


이제 남은 일정은 특별한 건 없다. 돌로미티 사진들이 너무 예쁘고 좋아서, 지금은 눈길일 거라 갈 수 조차 없겠지만, 그냥 가장 가깝게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서 산공기 마시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베니스에서 하루밤 자고. 오늘 운전을 오래 해야 하는데 친구 다리가 버텨줄지가 좀 걱정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투어는 대박이었고, 기대했던 피렌체는 힘들었다. 남은 일정 중 내가 기대하는 건 베니스에서 먹을 해산물 스파게티인데... 과연 어떻게 되려나... 좀 더 여행자 모드로 즐기기 위해 노력해야 겠다... (지금은 걸을 수도 없지만...ㅠ.ㅠ)


끝으로, 피렌체에서 내 눈에 예뻤던 것들... (뭔지는 잘 모른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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