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대로라면, 토요일 느즈막히 베니스에 도착한 후, 일요일 새벽부터 집을 나서서, 급하게 베니스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점심을 먹고 시간을 200번쯤 쳐다보며 공항으로 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피렌체에서 과욕이 부른 대참사를 경험한 후, 시간적으로 가능하다고 진짜 가능한 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 토요일 일찍 이동/ 베니스 관광을 끝내고, 일요일은 비행기 타는 일 (베니스 => 로마 => 서울) 만 하기로 일정을 바꿨다.
간혹 유럽에서는 깜짝 놀랄만큼 높은 것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토스카나 숙소와 같이 발이 땅에 닿지 않아 혹시 내 무게 때문에 깨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변기이고, 이 숙소처럼 내 허리보다 높은 침대이다. 지금은 일요일 오전, 허리보다 높은 침대에 등반하여 마지막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다.
시간을 되돌려 토요일 오전 돌로미티. 베스트 드라이버인 내 친구의 한가지 약점은 이상하게 오전에는 구글이 가라는 방향을 잘 못 짚어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일단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한끗차이로 잘못 가서 5분쯤 둘러갔고, 큰 도로로 나오면서 잘못 빠져서, 구글이 "Rerouting" 을 한다는 메세지를 없애지 못하고 계속 어쩔 줄 몰라하자, 뭔가 후루룩 유턴을 하더니, 지금 이 유턴을 안 했으면 엄청나게 돌아갔을텐데, 신호등을 보고 안전하게 잘 했다며, 굉장히 뿌듯해했다. 친구의 영웅담이 차 속에서 떠나질 않고, 그 소리에 묻혀서 구글 지도 언니의 "Keep left" 라는 말을 놓쳐버리고 톨게이트에서 또다시 잘못된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기는 시골. 고속도로에서 선택한 이 잘못된 방향에 구글 지도 조차 망연자실 하더니, 도착시간이 40분 늘어나고, 22km 더 가서 빠져나가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안겨주었다. 출발한지 1시간이 지나서, 결국 돌고 돌아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갔던 톨게이트에 다시 진입하게 되었다. ㅠ.ㅠ 3시간 이었어야 할 운전시간이 4시간이 되면서, 친구는 몸도 마음도 크게 상처받은 듯 했고, 운전을 도울 능력이 안 되는 (심지어 구글 네비게이션 안내도 잘 못 봐주는) 쓸모없는 나는, 다소 어쩔 줄 몰라하며, 다시 좀 슬퍼졌다.
유료도로를 마지막으로 빠져나올 때, 돈받아주는 사람 손 모양이 없었다. 드디어 "톨비 카드 결제"라는 거사를 치러야 하는 순간이 되었다. 파란 카드 모양으로 가서, 긴장한 내 친구는 영어로 바꾸는 것도 잊고, 이탈리아 말로 떠들어대는 가운데 티켓을 넣고 카드를 넣었다. 게이트가 열렸는데, 친구는 망연자실했다. 게이트가 너무 빨리 열렸고, 영수증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결제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더구나 이태리어이지만, 서비스 센터로 가라고 한 것 같다고 했다. 잠시 서비스 센터를 찾아 서성이다가, 내가 "이탈리아 톨게이트는 영수증을 달라고할 때만 준다" 는 걸 찾고, 혹시 결제가 실패했어도 15일 이내 돈을 내면 된다는 정보를 찾아 간만에 쓸데 있는 역할을 해서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카드 내역 확인 결과 무사히 잘 결제가 된 것이었다)
1시쯤 예약한 베니스 내륙 호텔에 도착했다. 마침 치워둔 방이 있다며 운좋게 바로 체크인을 할 수 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베니스로 출발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다양한 정보를 기본적으로 얻는 게 너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던 예전 출장 다니던 시기에, "유럽 소매치기 조심해야 해" 라는 건 그냥 뻔한 잔소리처럼 들렸던 것 같다. 큰 조심성 없이 출장을 다니다가, 베를린 기차역에서 여권, 지갑, 노트북이 들어 있는 가방을 도둑맞은 적이 있다. 2인 1조로 움직이는 아이들이었는데, 노트북이 든 가방이 무거워서 내 발옆에 내려놓았었는데, 한명이 나한테 말을 걸면서 시선을 돌리게 한 사이에 다른 한명이 가방을 들고 날랐다. 회사 소스 코드가 다 들어 있는 노트북을 도둑맞은 것도 미안했고, 분실한 여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 지사에서 고생해 주셔서 그것도 많이 미안했었다. 그 때 이후로 여권이나 지갑같은 걸 분실할까봐 조금 걱정이 많아졌는데, 호텔에 체크인이 되니 여권을 안 가지고 다녀도 되어서 안심이 되었다.
친구는 배멀미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급적 배는 타지 않고, 걸어다니기로 했다. 어딘가에서 Ristorante 는 고급식당이니까, Trattoria 라고 써진 식당 중에 대문에 스티커 (맛집 인증 스티커) 가 많은 집을 찾으면 바가지 쓸 확률이 낮고 맛있다는 걸 봤었다. Trattoria 중에 추천된 식당이 하나 있어서 안전하게 거기로 가자 싶었다. 이 식당의 점심 시간은 12:00 - 2:30. 원래는 12시에 1번으로 도착하는 상상을 했었는데, 2:30 전에 갈 수 있을까, 혹시 시에나 식당처럼 3:00 라고 되어 있는데, 2:30 부터 새로운 손님은 받지 않는건 아닐까, 같은 몇가지 불길한 생각들을 하면서 버스에서 내려 20분 정도 걸어가서 2:20 에 그 식당의 거의 마지막 점심 손님으로 세이프 되었다. 한국어로 된 후기가 좀 많다 싶긴 했었는데, 역시 한국인들이 꽤나 오는 모양이었다. 그 후기에 "해산물 스파게티, 오징어 튀김, 티라미수 맛있어요" 라고 되어 있었는데, 내가 해산물 스파게티 라고 하자 "오징어튀김도 먹을거지?" 라고 물어봤다. 공부하려고 했는데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를 안 하는 성격이라, 약간 언짢아질 뻔도 했지만, 여행와서 언짢기는 시간이 아까우니까 성격을 잠시 바꿔서 좋게좋게 반응했다. 대신 오징어튀김 말고 다른 걸 시켰다. 내 반항심을 위한 작은 배려였달까.
어렸을 때 죽기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정했었는데, 1) 일본 가서 스시 먹고 2) 홍콩 가서 딤섬 먹고 3) 이탈리아 가서 파스타 먹고 였었다. 요즘은 워낙 한국에서도 돈만 쓰면 현지 못지 않은 맛있는 것들을 먹을 수 있어서, 어렸을 때 출장다닐 때 먹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탈리아 와서 내 입맛에 맞는 첫 스파게티였고, 친구도 좋아했기 때문에, (스파게티 말고 좀 더 다른 면종류를 찾아보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정도면 됐다고, 훌륭했다고, 만족하기로 했다. 가격표도 훌륭했다. 자리세는 한 사람당 1.5 유로, 물은 3유로. 더 붙이는 것 없이 딱 음식값대로.
식당 바로 옆이 아카데미아 미술관이고, 마침 우피치 미술관 투어에서 베니스는 물감 들여오기가 용이해서, 색채감이 뛰어나다는 것을 배운터라,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갔다. 운전의 여파로 친구는 잘 못 걸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친구는 미술관을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될텐데, 친한 사이일수록 자꾸 배려하다보니, 억지로 참는 것들이 생기는 것 같다. ㅠ.ㅠ 나도 내가 싫은 것보다, 상대가 좋아할 것 같은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이해가 간다. ㅠ.ㅠ 어쩔 수 없는 듯 ㅠ.ㅠ 하여간 미술관은 좋았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없다해도, 베네치아에서 살고, 거기서 작품활동을 한 화가들의 작품을 모았다는 게 도시로 봐서는 엄청 간지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우피치 투어에서 배운 여러가지 것들 덕에 미술관 보는 재미가 조금 더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보는 애가 화가일 확률이 높다고 해서 그림에서 나를 보는 아이를 찾기도 하고, 같은 화가의 작품에서 같은 얼굴이 반복되면, 혹시 친인척인가 상상해보기도 하고.
절뚝거리는 친구한테 괜찮냐고 100만번 물어보고, 괜찮다는 대답을 100만번 듣고, 드디어 베니스의 심장인 산마르코 광장으로 가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다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깨달았다. 베니스는 정말정말 사진발이 기가 막힌다. 날씨가 나쁜 건 아니지만 아주 좋은 건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볼 때의 풍경이 "오" 라면, 그걸 찍은 사진은 "우우우와아아아" 였다.
지나가다가 막 찍은 사진들
베니스의 골목은 토스카나나 피렌체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망쳐 놓은 것들이 좀 있다. 낙서는 그래도 정겨움이 있는데, 가끔 찌린내가 심한 골목들이 있다. 하여간 이 골목 저 골목, 이 광장 저 광장 굽이굽이 헤쳐서, 사람으로 가득찬 리알토 다리에서 "여기는 왜 유명할까" 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드디어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했다. (밖에서 걷기 시작하자, 절뚝이던 친구는 마치 은혜 입은 환자마냥 통통 뛰어다녔다.) 산마르코 성당은 이슬람 쪽의 양식이 결합된 금빛 비잔틴 양식이라던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화려했다. 시간이 늦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한번쯤 들어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들었다. 원래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은 두칼레궁전이었는데 (무료입장이 없는 관광지가 좀 더 믿을만한 것 같다), 이건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고, 산마르코종탑으로 갔다. 이 종탑은 10유로 현장 구매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걸어서 올라가는 게 아닌데다, 풍경도 그리 높다는 느낌이 안 들고 멀리 보여서, 고소공포증이 있어도 무리 없이 즐길 수 있다. 거리에 사람은 많긴 했지만, 종탑 대기자가 많은 건 아니라서, 별로 기다리지 않고 수월하게 종탑에 올라갔다. 여기가 우리 마지막 관광지라는 느낌에 마치 밥을 꼭꼭 씹어 먹듯이 경치를 꼭꼭 씹어 간직하려고 애썼다.
종탑에서. 360도로 회전하면서 경치를 볼 수 있다.
베니스는 모든 곳이 "보이는 것보다 사진이 더 예쁜" 특징이 있다. 신혼여행처럼 평생 사진을 남기는게 큰 의미가 있다면, 좋은 선택일 것 같은데, 그냥 여행이라면, 약간 손해보는 기분이 분명히 있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내가 쌩눈으로 본 것처럼 이쁘지 않으면, 쌩눈으로 본 내가 승자 같은 묘한 좋은 기분이 든다. 반면, 사진이 더 예쁠 때는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것 같다.
수상택시라는 존재가 독특하다보니, 구글지도가 정신을 못 차렸다. 분명히 난 A 에서 B 로 걸어가고 싶다고 하는데, 수상택시를 걷는 루트에 포함시켰다. 겨우겨우 포인트들을 찍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 와서 호텔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버스에서 정류장 이름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내리겠다" 고 할 때만 내려주는데, 다음 정류장이 어딘지 알려주지 않으니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정류장은 멈춰서더라도 정류장 이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갈아타는 곳은 어떻게 운좋게 찾아서 내렸는데, 마지막에 내릴 때는 그냥 구글 지도로 현재위치 보면서, 비슷하게 가까워졌을 때 내렸는데 맞게 내려서 로또 당첨된 듯 기뻐했다.
다음날, 여유롭게 호텔에서 나와서, 렌트카를 반납하는데, 계산이 좀 어긋나서, 기름을 만땅을 채워야 하는데 5유로 어치를 더 넣어야 만땅이 될 것만 같았다. 10유로를 넣기는 아깝고, 5유로짜리 지폐는 가진게 없어서, 렌트카에서 채우는게 비싸봐야 5-10유로 사이겠지 생각하고 그냥 공항으로 갔다. 그랬더니 무려 50유로를 달라고 했다. 어이 없어 했더니 30유로로 깍아준다길래, 그냥 다시 공항밖으로 나와서, 10유로 어치 기름을 넣어서 리턴하는 헤프닝이 있었다.
이게 마지막 헤프닝일 줄 알았는데, 로마공항에서 짐을 찾으려는데 친구의 짐이 나오지 않았다. Lost and Found 로 가서 한참을 기다려 얘기를 했더니, 원래 28번으로 나왔어야 하는 짐이 27번으로 나왔다고 했다. 27번으로 갔더니 정말로 친구의 짐이 있었고, 조삼모사든 어쨌든, 진짜 무지하게 기뻐서, 짐을 꼭 끌어안고 환하게 셀카를 찍으며 "이 정도면 좋은 결말" 이라고 기뻐했다.
친구랑 몇가지 생각을 나누어 보았는데, 상당부분 생각이 같았다.
젤 좋았던 곳은 피엔차, 특히 주변 드라이브.
젤 맛있었던 음식은 피렌체 극기훈련이후 숙소에서 먹은 오징어짬뽕.
젤 후회되는 일은 친구는 돌로미티에서 나올 때 Keep left 안 한 거, 나는 시에나에서 고기 요리 못 먹은 거 (시에나에서 고기 요리 먹었으면, 피렌체 점심 때 입맛 안 맞던 그 식당을 안 갔을테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친구는 토스카나 숙소 아저씨, 나는 로마 호텔 프론트 아저씨.
젤 좋았던 숙소는 조식을 안 주는 것 말고 모든 것이 더할나위없이 완벽했던 토스카나 숙소.
일을 열심히 하는 건, 나의 오랜 버릇이다. 재밌는 일이건, 재미없는 일이건, 일은 습관처럼 열심히 해 왔고, 열심히 하지 않는 방법을 잘 모른다. 나이를 먹고 머리가 나빠지면서, 일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더 길어졌다. "이 정도는 일주일이면 하겠네"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어리고 총명했던 내 얘기고, 나이 먹은 나는 3-4일이 더 걸리는데, 그걸 따라잡으려면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서, 그냥 열심히 한다. 그러다가 브레이크가 풀어지면, 여러가지 방법으로 멈추곤 하는데, 이번엔 이 여행이 브레이크가 한번 되어준 것 같다. 요즘 서운한 게 너무 많아서 슬슬 좀 불안하던 차였는데, 할 줄 모르는 여행을 꾸역꾸역 마치고 나니, 회사 생각은 아무것도 안 나기도 하고, 좀 겸허해 지기도 하고. 그러한 듯.
언제 또 이런 여행을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그 때 다시 브런치에 매일 글을 써야겠다. 하루하루 잊어버리기 전에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겐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다. 여기는 로마 공항 라운지. 체크인 한시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