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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막] 깁스와 산티아고 순례의 상관관계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800km 순례 D-DAY! 

"깁스라고요?"


2019년 4월 1일 월요일, 퇴사까지 하며 준비하고 기다리던 산티아고 800km 순례길 여정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저녁 6시 비행기를 위해 2시 반 정도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런데 늦은 아침을 먹고도 줄어들지 않는 오른쪽 발의 통증이 영 심상치 않았다. 

"일반적인 여행도 아니고 무거운 짐 들고 오랫동안 걸으러 가는 건데 출국 전에 꼭 병원 들러서 약이라도 충분히 준비해가"


문득 친구의 말이 생각나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에 병원에 들렀다. 의사는 황당한 얼굴로 물어본다.

"산티아고 순례요? 그거 걸으러 가는 거요? 그걸 간다고요? 오늘요?"


나도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깁스라고요? 지금요?"


이렇게 '이상한 순례길'은 시작되고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발목 인대가 늘어났으니 한 달간 주사를 맞으며 치료하자고 말하던 의사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를 듣자 "지금 걸으면 평생 못 걸을 수도 있다"며 겁을 줬다. 그리고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래도 가야겠으면"이라고 말하면서 반깁스와 한 달치 소염제, 영어로 된 처방전을 준비해줬다. 


생애 첫 깁스였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퇴사까지 불사하며 준비한 산티아고를 이 꼴로 가야 한다니 기가 막혀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났다. 


인천공항 게이트까지 무사히 도착!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서도 가다 쉬다를 수십 번 반복하며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냥 포기해야 할까? 비행기는 지금 환불이 되나? 걸을 수나 있을까? 당분간 바지는 못 입겠다. 신발은 배낭에 넣어가야 하나?" 


약 타러 갔다온다던 병원에서 '형광 초록색 반깁스'를 하고 돌아와 현관에서 신발도 제대로 못 벗고 있는 나를 쳐다보던 부모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3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산티아고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고행길을 떠난다고 했을 때도 같은 표정이었다. "꼭 가야겠니?" 부모님 말을 뒤로하고 마지막 짐을 꾸렸다.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


입국 아니고 출국 '공항패션'(aka 거지꼴)

대도시 갈 때 입으려고 준비했던 면바지를 빼고 그 자리를 약봉지와 붕대로 채웠다. 깁스 때문에 신을 수 없게된 트레킹화의 오른쪽 신을 배낭에 마지막으로 구겨 넣으니 '터질 것 같은 8.7kg 순례 배낭'이 완성되었다. 


깁스 때문에 입을 수 없게된 청바지 대신 옆이 찢어진 도톰한 겨울 치마에 완전쌩얼까지 더해져서 충격적인 '공항패션'도 완성되었다. 이렇게 출발부터 800km 순례길을 다 걸은 포스를 뿜뿜하며 공항에 도착했다.  


"어디까지든 일단 갈래요" 총. 총. 총.

발이 불편해서인지 서둘렀는데도 비행기 시간이 빠듯했다. 보안검색대로 들어가려는데 이제라도 포기하라며 엄마가 운다. 나도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애써 한번 씨-익 웃어 보이고 밝게 돌아섰다. 


심사를 마치고 면세구역에 들어서니 출국 전에 '커피 한잔' 하기로 했던 공항에서 일하는 친구가 휠체어를 들고 서있다. "직접 보니 더 황당하지?! 하하하하"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란 표정을 뒤로하고 친구는 게이트를 향해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고 늦지 않게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만우절 거짓말 같이 시작된 내 순례길 첫날 풍경이다. 이렇게 40일간의 순례는 앙증맞은 형광 초록색 깁스와 함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인간의 계획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신은 인간의 머리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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