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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시작이 어렵습니다만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1년 후

정확히 1년 전, 깁스하고 떠났던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몸은 쓰러질 것 같이 피곤했지만, 정신은 아주 또렷했고 영혼까지 맑아진 개운함이 나를 가득 채웠다. 순례를 시작하던 첫날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시간이다.


퇴사하고 산티아고를 계획했었다. 물론 나름의 기준대로겠지만 아주 철저히, 꼼꼼하게 준비했다.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자료를 찾아내 공부하면서 들러야 할 마을과 봐야 할 것들, 먹어야 할 것들까지 정리해두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800km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는 첫날, 내 오른쪽 발목에는 초록색 반깁스가 채워졌다. 미처 이 장면까지는 계획하지 못했지만 나는 ‘생애 첫 깁스’와 8kg이 넘는 배낭,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인천공항을 나섰다.


첫날의 풍경


알 수 없는 오기로 출발은 했지만, 불편한 발과 더 불편한 마음으로 연민의 눈빛과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도움으로 파리-바욘을 거쳐 루르드, 떼제를 돌아, 결국 최종 목적지였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목적지와는 정반대로 가기도 했고 두려운 순간들이 엄습할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 이상한 루트와 어둠의 시간들이 나만의 멋진 무늬로 새겨져 40일의 시간을 완성해 주었다. 야고보 성인의 무덤, 죽음을 향해 걸었던 그 길의 끝,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올려다보던 그 밤, 모든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던 그때, 평온함과 기쁨의 눈물이 터졌다. 완주는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한 그 이상한 순례길은 나만을 위한 신의 맞춤형 선물이었다는 확신이 온몸을 덮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정문


이상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길을 다 걸어낸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오랫동안 미루던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여행의 시간들을 글로 정리해 사람들과 나누었다. 더 높은 연봉과 더 높은 직급으로 새로운 직장을 구해 다시 출근도 했다. 나의 철저했던 산티아고 계획처럼 아주 완벽했다.


이상한 순례 후,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많은 것이 그대로였다. 아니 되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반복되는 야근과 회사 안에서의 정치게임, 폭언들로 마음 상하는 날이 계속됐다. 출퇴근 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눈빛은 또다시 생기를 잃어갔다. 그러던 중, 엄마의 수술 날짜가 잡혔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수술 후에 깨어날 자신이 없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허무하게 또 무너져 내렸다. 결국, 엄마를 핑계로 회사를 다시 그만두었다. 인생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산티아고를 걸어내고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지만 나는 또다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댔다. 죽고 사는 것,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 야고보 성인의 무덤, 죽음을 향해 걸었던 그 길 위에 나는 여전히 서있는 것이었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후, 많은 것이 달라졌고, 많은 것이 그대로이며, 많은 것이 되돌아온 것 같지만, 내 안의 아주 깊은 곳에 작은 씨앗 하나가 심겨 자라고 있다. 여전히 반복되는 삶의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본다. 미워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럽게. 그리고 1년 전 봄, 깁스하고 인천공항에 서 있던 순례의 첫날을 기억해낸다. 계획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던 그때를. 작은 발걸음 하나 내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를. 그렇게 독특하고 아름다운 나만의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하던 그때를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낸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 순례길의 모든 발걸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매일의 죽음과 매일의 삶에서, ‘지금, 여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떠올려본다. 그것이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아주 작은 용기일지라도 말이다.


삶은 매일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나에게 묻는다. 포기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슬퍼하고만 있을 건지, 아니면 다시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 걷기 시작할 건지.


너무나도 자주, 쉽게 무너지는 내 삶에서 여전히 나의 시작은 어렵지만, 여전히 나는 작은 용기를 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가만히 희망의 씨앗을 돌본다. 마음에 새겨진  씨앗들에 매일 물을 주고 햇빛 좋은 창가에 내어놓는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들을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신이 내게 바라는 유일한 일일 테니까. 오늘도 가끔은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귀여운 새들이 와서 쫑알거리며 말을 걸 테고, 다시 따뜻한 햇볕이 비출 테니까.


그렇게 다시,

매일이, 매 순간이 시작이다.


잘 지내시죠?! 40일간의 이상한 순례길을 다녀온 지 벌써 1년이 지났네요. 그 사이 이스라엘 순례도 다녀오고 회사도 들어갔다 다시 나왔구요. 엄마의 수술로 온 가족이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예전의 컨디션으로 회복되셨어요. 코로나 때문에 온 가족이 다시 비상사태이기도 했지만요. 이제 다시 평화가 찾아올까요?! 그러다가 또다시 어둠이 오고, 그것의 반복이 살아가는 것이겠죠?!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엊그제 산책 길에서 만난 문장인데요. 계획대로 되는 것 하나 없고 계속 무너져 내려도 오늘 나에게 주어진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보려 해요. 아주 이상하고 망쳐버린 것 같아도 분명 그래서 더 아름다운 나만의 무늬가 생길 테니까요.


지난 1년여간, 산티아고와 이스라엘, 순례길을 두 군데나 다녀오고 또 그 기록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짐에 감사합니다. 이 경험들을 토대로 순수하되 순진하진 않게, 오늘도 잘 살아내 보겠습니다. 함께 걷는 모든 분들의 '이상한 순례길'도 응원합니다. 부엔 카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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