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신나게 놀다 온 우리들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시가 넘어 먹는 첫끼는 스테이크가 올라간 비빔면이었다. 요리를 즐기지 않지만 BTS의 팬인 P가 준비해 주었다. BTS가 해외 가면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했다. 스페인의 납작 복숭아와 까바도 곁들였다. 주당 고객들을 위해 술은 그 이후로도 매끼마다 제공되었다. 아침부터 찐친과 모닝음주로 시작하는 이곳이 진정 파라다이스였다.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식구들을 위한 밥도 차리지 않고, 날 귀찮게 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 이 여유로운 아침, 아니 점심을 만끽했다.
방탄아 고마워~~덕분에 P에게 밥도 얻어먹었다!
오후의 두 번째 클럽일정은 무제한 음주가 제공되는 선셋 보트 파티였다.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해가 질 때까지 춤추다가 돌아온다고 했다. 가무는 즐기지 않지만 술을 사랑하는 Y에게도, 술은 즐기지 않지만 춤을 사랑하는 K에게도 파라다이스행 보트일 것이다! 여러 업체의 보트가 있었는데 제일 신나고 핫하다고 소문난 CDNL 보트로 전날 예약해 두었다. 처음 해보는 새로운 보트파티에 기대가 되면서 한편으로 드는 걱정. 몇 시간 동안 흔들리는 배 위에서 춤을 춘다고? 그것도 술을 마시고? 음… 배멀미 괜찮을까? 어제 먹은 것들과 대면하고 싶지는 않은데!
한여름의 스페인답게 창밖으로 보기에도 햇빛이 이글이글했다. 보트에서 젖을 테니 수영복을 입고 선크림과 선글라스, 모자로 무장을 했다. 어제 알아본 바로는 숙소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체크인 센터가 있고 그곳에서 프리 파티를 즐기다가 5시쯤 배를 탄다고 했다. 채비를 마치고 해변을 따라 걷는데 생각보다 거리가 꽤 멀었다. 뜨거운 햇빛에, 푹푹 빠지는 모래에, 어제의 피곤에.. P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아뿔싸!
발톱도 블링블링
여행 오기 전 우리가 정한 규칙이 있었다. 30년 동안 보아온 허물없는 친구들이지만 우린 너무 달랐다. 이렇게 긴 여행은 처음이니 싸울 일도 분명 생길 거라고.. 기왕 싸울 거면 속으로 참지 말고 대차게 싸워보자 했다. 그리고 다수의 의견이 갈릴 때는 다수결의 원칙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강렬하게 원하는 사람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P는 운동선수의 와이프인데… 운동을 극혐 했다! 숨쉬기 운동만이 전부인 P는 500미터 이상은 절대 걷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P를 위해 가까운 거리도 무조건 택시를 부르기로 했었는데 음… 이렇게 멀 줄이야.
땀을 뻘뻘 흘리며 체크인 센터에 도착했다. 모두들 지쳐 테이블에 앉아 동태눈으로 말없이 맥주를 홀짝였다. 노세 노세 젊어노세는 명언이다. 마흔다섯 살의 고객들은 가이드가 술만 먹이고 제대로 된 밥도 안 먹인 채 쪽잠 재워 강행군시킨다며 불만이 속출했다. 한 시간가량 지났을까 드디어 배를 타러 간다고 했다. 소지품을 챙겨 직원을 따라가는데… 이럴 수가! 배를 타는 곳이 바로 우리 숙소 앞이었다. 이미 어제 티켓을 사둔 우리는 프리 파티에 가지 않고 그냥 숙소 앞에서 배를 탈 수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어제 직원이 말해줬던 거 같기도 하다. 미안해 P야. 듣기 평가를 잘하지 못했어...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지친 친구들이 터덜터덜 또 걸었다. 경보위기 발령! P양 집으로 돌아가기 일보직전 ㅋ ㅋ ㅋ 그렇게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 보트에 맨 마지막으로 탑승했다.
아까왔던 길 되돌아가는중
보트는 2층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1층을 둘러보고(쉴 수 있는 평상이 있었다-취한 사람들을 위한 곳일까?) 사람이 바글바글한 2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먼저탄 사람들이 의자를 선점한 뒤였고 늦게 탄 우리는 의자 사이 복도에 낑겨 어정쩡하게 선채로 배가 출발했다. 출렁이는 파도를 제치며 나아가자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뽀글 머리 DJ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배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직원들은 능숙하게 이리저리 술을 날랐다. 뜨거운 태양아래 흩날리는 머리카락, 쿵쿵거리는 비트에 알콜을 홀짝이자 살짝 어색하고 피곤했던 마음이 풀리며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기대에 찬 들뜬 표정을 나눴다.
앉은 채로 들썩들썩 움찔움찔 소극적으로 리듬을 타던 사람들은 DJ의 연주와 함께 동작이 조금씩 커졌고 한 두 명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음악은 점점 달아올랐고, 비트가 고조되고 고조되고 고조되다가… 빵 터졌다!! 간신히 앉아있던 사람들도 못 참겠다는 듯 와~~ 하며 한꺼번에 일어나 버렸다. 출발한 지 15분 만이었다. 모두 작정하고 올라탄 사람들이 아니던가! 배안은 춤은커녕 서있기조차 비좁았고, 출렁이는 파도에 사람들이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렸다. 그 안에서 춤추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잘 출 필요도 없고 잘 출 수도 없었다. 마구 부딪히고 누군가 술을 쏟고 정신없는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신나게 춤췄다. 와… 이 배 너무 신나는데?
쒼나 쒼나
우리 앞쪽으로는 눈에 띄는 그룹이 있었다. 30여 명가량의 여자들이 핫핑크 힙색에 검은 수영복으로 맞춰 입고 열정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20대부터 할머니까지 나이대도 너무 다양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잉글랜드에서 왔고 브라이덜 샤워 중이라고 했다. 신부와 친구들, 신부 어머니와 친구들, 신부 시어머니와 친구들, 그리고 신부의 대모할머니까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수영복을 맞춰 입고 춤추는 광경이라니!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한국 유교며느리들에게는 정말 문화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신부와 친구들은 우리 뒤쪽에 있던 몸 좋고 순수해 보이는 모모라는 청년을 짓궂게 계속 불러 같이 춤췄다. 배안의 사람들은 “모모, 모모” 외치며 신부의 마지막 일탈을 함께 했다. 모두들 기분 좋게 취한 채 내일은 없을 것처럼 열정적으로 춤을 췄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함께하는 대환장 파티! 진심 부럽다
조금씩 지쳐갈 때쯤 배는 바다 한가운데에 멈췄고 사람들은 시원한 바다로 풍덩풍덩 뛰어들었다. 우리 중에는 (평지에선 500미터 이상은 못걷는)P만이 바다 수영이 가능했다. 물공포증이 있는 L은 망망대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P를 부러워하며 꼭 수영을 배워 다시 오리라 결심하게 된다(현재 초급반에서 열심히 강습 중이다).
신나는 수영을 마치고 배는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빨갛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혼신을 다해 춤을 췄다. 나는 앞자리 신부의 대모할머니와 계속 대화를 나눴다. 무슨 대화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도 나중에 우리 딸 결혼식 때, 아니 우리 손녀의 결혼식 때 이비자에 와서 같이 춤추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신나게 놀기엔 너무 늙었다는 나의 편견을 깨준 이 멋진 보트를 다시 탈 수 있을까? 그쪽 사돈이 깨인 분이어야 할 텐데!
해가 질때까지 춤추고 마시고
배는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왔고 신나는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두 친해져 있었다. 대면대면 올라타 모두 친구 되어 내리는 마법의 보트였다. 해가져 어둑어둑해진 해변가를 걸어 아무 음식점이나 들어갔다. 아침에 비빔면 하나 먹고 주구장창 술만 마시다 (배안에는 변변한 음식이 없었다) 먹는 제대로 된 첫끼였다. 느긋한 시에스타의 나라 스페인답게 음식은 한 시간이 되도록 나올 생각이 없었다. 배터리 방전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고 저질체력 K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몇 시간 뒤에는 세 번째 클럽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나이에 이비자 클럽투어라니… 우리,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