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김영우 / illustrator 이민정
놀이 운동가로 오래 활동해왔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놀이 운동가는 희극적인 직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이들이 노는 건 당연한 건데, 이걸 운동으로 해야 한다니요. 제가 하는 일을 풀어서 설명하면 ’어린이 욕구에 적합한 놀이터 만들기 중재자’ 예요. 놀이터는 만드는 주체와 사용하는 주체가 달라요. 그런데 만드는 과정에서 놀이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죠. 바로 어른이죠. 반대로 가장 힘이 약한 사람이 바로 놀이터를 사용할 어린이들이에요. 저는 이 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합니다. 줄여 이야기하면 놀이터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지요.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등의 책에서 놀이 효과나 결과보다는 놀이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놀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편이에요. 놀이의 의미가 굉장히 왜곡되어 있거든요. 비석치기, 사방치기 같은 것만 놀이로 생각하는 것도 오해예요. 그건 게임에 가깝지요. 오히려 ‘자유’라는 말이 놀이를 설명하기 적합한 말이에요. 스스로가 하고 싶다고 느끼는 걸 하는 게 놀이입니다. 어떤 걸 하고 싶다는 마음, 또는 반대로 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게 놀이예요.
놀이가 곧 자유나 자율성, 주체 의식을 의미한다는 말인가요?
우리는 아이를 뭔가 해줘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놀아 준다”는 표현은 아이를 어른보다 낮은 위치로 생각한다는 걸 보여줘요. 그런데 놀이는 누가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예요. 아이들을 독립적인 주체로 보면 쉬운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놀 때도 말을 잘 듣기 바라잖아요. 그런데 놀이는 그렇지 않거든요. 어른들 말을 듣고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하잖아요. 어른들이 짜놓은 대로 아이들이 따라 하도록 한 건 프로그램이고 체험이지, 진정한 놀이가 아니에요.
아이들의 놀이에는 ‘놀 공간, 놀 틈, 놀 동무’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요즘 도시 아이들에게는 이 모두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안동으로 귀촌해 10년 넘게 살고 있는데요, 그곳은 좀 다른가요? 안동의 아이들은 어떻게 노는지 궁금합니다.
다르다는 이야기를 기대하고 물었을 텐데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 가면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는 건 착각입니다. 어디에 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에 대한 부모의 태도가 바뀌어야 하는 거예요. 도시에 살아도 아이들이 맘껏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부모가 있고, 아무리 시골에 살아도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걸 못 보는 부모도 있거든요.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라는 책에서 “세상에서 으뜸으로 훌륭한 놀이를 꼽으라면 나는 부모가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 옆에서 따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궁금합니다.
불행히도 도시라는 곳에서는 부모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요. 그게 큰 문제죠. 제가 어릴 때 했던 놀이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엄마와 함께 김치를 담그는 거였어요. 그런데 요즘은 김치를 집에서 담그지 않는 경우가 많죠. 부모의 구체적 삶 속에 함께하는 게 최고의 놀이거든요. 그런데 아빠는 일하러 회사에 가고, 회사에 가서도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 일하니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구체적인 게 하나도 없어요. 아이들과 일부러 놀아주지 않아도 부모가 어떤 일에 집중하고 진지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비로소 아이들이 몰입할 수 있고, 놀이의 세계에 훨씬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놀이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방법을 모르니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는 부모가 많아요. 이렇게 아이들에게는 소비가 곧 놀이가 됩니다. 오로지 무엇을 살 때 잠시 행복을 느끼는 아이가 늘고 있어요. 놀이도 ‘소비’되고 있지요. 놀이는 누가 만들어놓은 걸 소비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아이들이 놀고 싶을 때 놀고 싶은 방식으로 놀고 싶은 사람과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을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떻게 창의적이 될 수 있겠어요? 아이들은 사실 타고난 놀이 전문가예요. 심심하다고 느끼면 뭐든 하면서 놉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점이 부모가 안정된 상황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불안하면 아이들이 절대 놀 수가 없거든요.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노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럼 우리 아이가 생기가 있다는 사실, 무엇을 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싹을 틔워주어야 하는데 그걸 누르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게 요즘 현실입니다.
놀이가 소비되는 상황에서는 안타깝게도 빈부의 차가 반영되기도 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세상이 공평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부모는 아이에게 드론을 사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드론은 몇 가지 기능을 할까요? 아마 아이들은 금세 지루할 겁니다. 아이들은 장난감 말고 친구와 놀고 싶어 해요. 친구는 몇 가지 기능을 할까요? 아이들에게 뭘 사줄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장난감은 결국 부모가 편하려고 만든 발명품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부모가 친구 역할을 할 수는 없나요?
그건 부모의 착각이에요. 그게 아이들한테 재미있을까요? 젊은 부모에게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지내라고 하면 그게 재미있을까요? 부모가 친구 역할을 한다는 건 차선이지, 최선이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과 아이들이 친구가 되어 자연스럽게 세상을 알아가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에요. 그런데 부모가 억지로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줄 수는 없지요. 결국 부모가 사회에서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느냐가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 부모가 사회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가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겠어요?
지난해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는 책을 냈습니다. 서문에서 놀이터 play ground는 놀이 play보다 터 ground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도시인지 시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어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걸 종합하자면, 결국 여기서 말하는 그라운드는 바탕이나 토대를 말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운동장이나 놀이터 같은 공간만 말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나 환경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아이들이 놀이터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또래 친구들과 놀 때 그 안에서는 모든 게 다 이뤄집니다. 아이들이 맘 놓고 눈치 보지 않고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즉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해요. 그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고는 불안해서 놀 수가 없을 겁니다. 부모가 불안해하면 아이도 성장할 수 없어요. 안정된 환경이 만들어지면 아이들은 어디서든 잘 놉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끊임없이 흔드는 게 부모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게 계속 뭘 사주고, 시키고, 간섭하면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부모가 좋은 부모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예요.
“좋은 부모는 가장 적게 요구하는 부모이고, 진정 좋은 부모는 요구하지 않는 부모”라고 했습니다. 그럼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하는 것 외에 부모는 어떤 것을 할 수 있나요? 아이들을 잘 관찰하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 주는 것도 부모 역할이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다치는 걸 걱정한다는 건 ‘아이들은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거예요. 그런데 아이들은 다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요.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이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족쇄가 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추론’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깨우칠 수가 없어요. 직접 만져보지 않고 어떻게 뜨겁다는 느낌을 알겠어요? 부모가 아무리 뜨겁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이들에게 생생한 삶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게 놀이예요. 예를 들어 우리는 아이들이 칼을 가지고 놀면 안 된다고 뺏어요. 그런데 아이 심리가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어 하죠. 칼은 도구예요. 잘못 사용하면 찔리기도 하고 베이기도 하죠. 위험하다고 치우거나 빼앗기 전에 어떻게 사용하는지 사용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단 아이들의 관심을 존중해야지 무조건 뺏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부모가 먼저 오늘은 뭘 해보자고 해서 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건 시켜서 하는 거지 아이들이 원해서 하는 게 아니니까요. 아이들이 먼저 관심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 아이들이 놀이의 주인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전 세계 놀이터를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나라별로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유럽의 놀이터 기준을 보면 첫 번째가 뭐라고 되어 있는 줄 아세요? ‘놀이터는 안전하게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처럼 놀이터를 안전하게 만든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놀이터는 아이들이 위험을 만나고 그것을 다룰 줄 알고 배우는 곳이다’예요. 그런데 우리는 위험을 회피하도록 가르칩니다. 위험을 회피한 아이들이 위험을 만나면 그걸 어떻게 헤쳐나가겠어요. 결국엔 어른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위험한 상황을 맞딱드린 아이가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해요.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는 세월호에 대한 제 답이었어요. 그런데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나라는 더욱 아이들이 위험을 만나지 못하게 막는 쪽으로 가고 있어 정말 안타깝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놀이터는 놀이 기구 없는 놀이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참여한 순천의 ‘기적의 놀이터’ 역시 놀이 기구 없는 놀이터라고 들었어요.
결국 놀이터는 아이들이 다양성을 만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놀이 기구가 없는 놀이터부터 하이테크 놀이터까지 다양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놀이터는 획일화되어 있어요. 궁극의 놀이터는 바로 다름 아닌 집입니다. 집은 아이들이 가장 마음 편히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에요. 멀리 있는 놀이터를 찾아갈 게 아니라, 아이들이 집을 놀이터 삼아 노는 걸 허용해야 합니다. 집에서도 못 노는데 어디 가서 맘 편히 놀겠어요. ‘집이 놀이터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볼드저널>의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빠들이 직장에서 간섭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아이 또한 당신에게 간섭받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그게 놀이예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바라는 모습이 있으면 말로 하지 말고 아이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세요. 이는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킬까 생각하는데, 사실 교육학이라는 건 직접 가르칠 수 없는 걸 간접적으로 아이에게 전달하는 방법이에요. 아이를 교육하려고 하지 말고 놀면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면 좋겠어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아이 스스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세상의 주인으로 살 수 있도록 놔둘 수 있는 부모가 되길 바랍니다. 누구한테 간섭받고 제지받고 통제받는 것은 정말 지옥이거든요.
인터뷰이 편해문은
20년 가까이 놀이 운동가로 살아왔다. 전국을 돌며 사라진 놀이를 수집하기도 하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놀이터를 취재하기도 했다. 올해로 아홉 살 된 딸과 네 살 된 아들과 함께 온 가족이 안동에 13년째 귀촌해 살면서 동네 아이들과 ‘적정 놀이터’를 함께 만들고 있다. 아이는 놀기 위해 세상에 오고, 아이는 놀이가 밥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과잉보호에 내몰리는 대한민국 아이들을 위해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는 책을 펴냈다. 놀이 기구가 하나도 없는 놀이터로 주목받고 있는 순천시 ‘기적의 놀이터’ 조성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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