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리 빼고, 모든 좌석이 핑크색이라면
임신 초기엔 잠이 쏟아졌다. 자도 자도 잠이 왔고 새벽마다 화장실에 갔다. 부쩍 입맛도 없어지고 기운이 없어 음식도 먹는둥 마는둥 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종로 가생이 언덕에 위치한 단독 주택에 살던 나는 30분가량 걸어 대중교통을 타고 강남에 내려 다시 20-30분가량을 걸어야 도착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초기 임산부가 더 위험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을 쓰고 살진 않았다. 임신을 무기 삼아 특혜를 얻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임산부 배지도 굳이 내어놓고 다니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배지를 내어놔도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이쯤되니 한국인의 시민 의식을 시험하고 싶은 맹랑한 생각까지 들었다. 어디 한번 배지를 내어놓고 있어볼까.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보았다. 3호선 지하철에선 배려석에 앉은 사람들 대다수는 앞을 절대 보지 않았다. 휴대폰에 눈을 박거나 잠을 자거나. 이 두 가지가 제일 많았다.
그때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배지를 꼭 내어놓고 다녀야겠다. 이제 한국에서 임산부는 멸종위기종에 가까워 사람들의 인식에서 더더 멀어지는 듯했다. 이제는 없어진 공룡을 다시 살릴 수도, 배려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그 순간이 머지 않은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럴수록 임산부는 배지를 내어놓고 존재감을 보여야했다. 임산부가 멸종한 시대엔 이런 배려석조차 사라질 테니까. 지금 내가 내어놓은 임산부 배지는 나와 내 이후의 임산부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몸이 점차 무거워지고 배가 당겨 걷는 게 힘들어질 무렵엔 서러운 날도 있었다.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선 임산부 배려석도 똑같이 경쟁의 대상이었다. 합리주의적으로 나는 임산부 배려석을 굳이 비워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는 이상, 주변을 둘러봐야할 의무는 있다.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내가 내릴 때까지 한번도 시선을 주지 않는 사람들(남녀 모두 그렇기에 젠더로 얘기하고 싶진 않다). 지하철에선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사람보다, 그 옆에 앉은 사람이 자리를 비켜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 어떤 날은 일부러 배려석 앞에 서있지 않고 문가에 있으면 굳이 나를 불러 임산부 배려석 자리에 앉은 사람을 깨우는 사람도 있었다. 감사하고 호르몬의 영향으로 눈물이 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임신으로 겪는 이 모든 경험이 사실 유쾌하지는 않았다.
사실 임신을 경험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땐 은근히 조마조마했다. 원치 않게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반대로 너무 감사한 경험도 종종 있었더랬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을 더하기 빼기로 정리할 수 없고, 내 감정은 좋음보다는 불편할 때가 더 많았다. 기분의 무게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제야 돌이켜보면 그 모든 불편한 느낌은 '서성거림' 때문이었다. 교통약자 좌석에 가서도 서성거리고, 임산부 배려석 앞에서도 서성이고, 혹여나 일반석 앞에 서있으면 마치 앞사람에게 양보를 종용하는 것 같아 서성대고, 문앞에 서면 이리저리 치여 서성이게 된다. 그러자 어째서 콕 집어 한 두 자리를 '임산부 배려석'으로 지정해두었을까, 그런 아쉬움도 생겼다.
사람들은 임산부 배려석이 생기면서 오히려 마음이 가뿐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예 지정석이 없었다면 모든 자리가 모두에게 열려있는 양보의 '기회'가 있는 자리였을 것이다. 임산부가 어느 곳에 있든, 누구든, 배려를 해야한다는 인식이 기저에는 생성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정 자리가 만들어지면서 오히려 그런 기회가 박탈되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저기 임산부 배려석 있는데 굳이 내가 왜 비켜줘?', '나라에서 아예 지정해준 특혜인데, 저기가 임산부 자리잖아' 같은 생각이 자리잡은 것이다. 그 때문에 '특혜'라고 하는 그 자리는 사실 정부의 출산율 정책의 보여주기식일 뿐이라고 느껴진다. 봐봐, 우리 이렇게까지 임산부를 위해 일하지? 이렇게. 정말로 진실되게 고민해서 만든 정책인데 이 모양 이 꼴로 전락한 거라면 안타깝지만 정부는 우리나라 시민의식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아무렇지 않게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놓고 '비키세요'라고 말해도 안 비켜줄 인간들의 종합이다.
더 확실하게는 한국사회에서 임산부 배려석의 존재 가치를 의미있게 만들려면, 시민의식을 바꾸는 게 먼저다. 지금의 임산부 배려석 정책은 낡은 시민의식에 그나마 있는 양심의 불편함마저 가볍게 만들어 주는 장치다. 내가 출산율 장려 캠페인을 기획한다면 임산부 배려석 하나만 핑크색으로 물들여놓을 게 아니라, 한 자리만 빼고 모두 분홍으로 바꿨을 것이다. 어차피 지하철에서 일반인보다 임산부를 만날 확률은 드물다. 핑크색 자리만 양보 가능한 자리가 아님을, 사실 전 좌석 모두가 양보할 수 있는 자리라는 걸 알려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멸종위기종을 향한 보호를 역차별이라고 울부짖는 시민들의 생태계라면, 멸종위기종은 영원히 멸종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