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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트 Mar 04. 2022

초보 소설가와 초보 운전자

초보운전자 하이(Chobo's high tension)



오랜 염원을 이룬 이듬 해 겨울,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

그즈음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얼마간의 마감과 취직,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스트레스성 폭식을 멈출 수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내가 살아가는 한 나를 떠나지 않는 그림자와 같았다.

언제나 내 편인 나의 어두움들.


그때 나에게는 운전을 할 거라는 꿈이 있었다.

면허를 따서 차를 몰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거라는.

 꿈은 예상보다 오랜 시간 동안 이루지 못했는데, 코로나로 이도저도 하지 못한 시기가 오히려 기회가  셈이었다.

최적의 면허 취득을 위해 서울이 아닌 곳에서 도전하기로 했다. 서울보다 덜 복잡하고 인적이 드물며 내가 잘 아는 곳.

그런 곳은 세상에 딱 하나뿐이었다.


면허를 따겠다고 말하자 엄마는 학원으로 직접 가 나를 수강생으로 등록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다른 집 스무 살들이 운전학원이며 어학연수로 앞날을 도모할 때 엄마와 나는 일종의 블랙아웃 상태를 견디며 다가올 앞날을 기다렸다. 개통되지 않은 지하터널을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처럼.

나는 엄마의 그 마음을 이해했다. 그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고 엄마가 딱히 미안해 할 필요는 없었지만 마음껏 미안해하게 놔뒀다.

마음껏 대신 학원비를 결제하게 놔뒀다.



‘초보운전자 하이(Chobo's high tension)’ 상태는 약 일 년 반 동안 지속된 뒤 작은 충돌사고와 함께 눈 녹 듯 사라졌다. photo by Lua



주옥같은 작가들이 모여 만든 AnA vol.1에서 초보운전자 하이가 극에 달한 사람의 에세이를 읽어보세요!

등단이란 사적 영역에 존재하던 나만의 소설이 데뷔탕트를 통해 공적 영역으로 이동하는 사건이다.

일기장과 블로그에만 존재하던 내 소설이 타인의 눈과 손을 거쳐 시장에 진열되다니!

그래서인지 데뷔 후, 얼마간은 혹독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소설가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불후의 명작을 써내거나 베스트셀러를 출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소설가… 란 무엇일까 여전히 의문 중).

약력 란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는 이력 한 줄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운전도 마찬가지다. 필기와 기능, 도로주행을 거쳐 마침내 자유롭게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 해서 순식간에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는 건 아니다. 운전과 소설은 둘 다 시간과 노력을 통해 나아진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약간의 센스도 필요해서 무작정 열심히만 한다고 되지도 않는다.

나는 이 자명한 사실을 면허 취득 후 처음으로 드라이브를 하다 깨달았는데, 약간의 두려움과 막막함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을 때는 6차선 국도에서 우회전 진입로를 지나쳐 낯선 길로 직진하고 있었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갓길에 차를 세우고 네비게이션을 뒤졌다.
다행히 그곳은 가려던 카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네비게이션으로 살펴본 길은 여러 갈래로 나눠져 있었다.
모두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지만 어떤 길은 더 복잡하고 어떤 길은 더 멀었다.
가장 빨리 도착하는 길과 가장 안전한 길이 같지 않은 것처럼.
길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예상보다 많았다.
문득 그 길을 다 가본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항상 엔진을 켜둘 순 없겠지만」(『AnA vol.1』, 은행나무, 2021) 中)


호기롭게 차를 빌려 친구와 여행을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운전에 대한 나의 애정은 짝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방문학습지로 일어를 공부할 때 세상 모든 히라가나만 보면 읽어댔던 것처럼(가타가나는 아직도 못 외웠다) 운전과 관련된 조금의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달이 났다. 그때 내가 원한 건 차를 갖거나 도로를 질주하는 것 이상의 감각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으면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안정감이 들었다.

가장 큰 위험이 도사리는 운전석에서 초보 운전자가 안정을 느끼다니? 이상하지만 정말 그랬다.

나는 운전을 할 때면 가본 적 없는 집에 돌아간 것 같은 향수를 느꼈다. 핸들과 기어는 손에 딱 맞았고 등과 허리를 따라 곧게 펴진 좌석 등받이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뒤통수에 닿는 헤드레스트의 단단함, 자동차로 가득 찬 도로, 좌회전을 위해 멈춘 교차로의 풍경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 달리는 앞 차의 뒷모습…

그 모든 게 너무나 평화롭고 안락하기만 했다.

어쩌면 운전면허는 이 풍경을 포함한 도로 자유이용권일지도 모른다. 이런 ‘초보운전자 하이(Chobo's high tension)’ 상태는 약 일 년 반 동안 지속된 뒤 작은 충돌사고와 함께 눈 녹 듯 사라졌다.

함박눈이 온 다음날처럼 조금 지저분하게.


안전과 안정. 오직 그것들만 바라던 때가 있었는데(라고 당선소감에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실렸다).

말이 나와 말인데 그 사진 속 사람은 내가 아니다(라고 쓰면 누군가는 찾아보겠지만 그러지 마세요 당신의 시간은 소중합니다).(대신 이걸 읽어보세요) 

신춘문예에 막 당선해 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있나? 적어도 난 아니었다.


하여간에 오랫동안 나의 화두는 ‘안정과 안전’이었다. 안정은 두말할 것 없이 경제적 자유로부터 온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유경제체제의 다양한 투자 방식과 자산 운용에 대해 도가 튼 사람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돈이 어렵고 무섭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까스로 이번 달 몫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 거기에는 지난 달 써 제낀 카드명세서와 공과금, 각종 보험과 여전히 남은 학자금을 무사히 납입하는 일이 포함된다. 그렇게 이번 달을 살아내고 다면 다음 달 몫의 불안정이 기다리고 있다.

불안정이라는 이쪽의 세계에서 한 달 여 간의 생활과 출근을 건너 저쪽의 안정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저쪽은 이쪽의 불안정이 되고, 불안정은 다시 안정을 향해 느리게 걸어가고… 나는 영원히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막차는 끊겼는데 다리는 아프고… 택시는 잡히지 않고, 아무 차나 타기도 싫고… 내 다리는 왜 사륜구동이 아닌 걸까, 나는 왜 운전도 못하고 차도 없을까.

더 이상 그런 내가 지겨워 면허를 따기로 한 것이다. 더 안전하려고, 안정을 느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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