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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트 Mar 04. 2022

나의 첫 차

기아 캐피탈의 추억



나의 첫 차는 92년도에 출시된 은색 캐피탈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 차는 아니었고 집에서 몰던 처음이자 마지막 차를 일컫는다.

당시에도 최고급 차종 중 하나였던 그랜저와 유사한 외관-커다랗고 각진 고전적인 준중형 스타일-의 가정용 세단은 약 십여 년 간 우리 집의 유일한 이동수단이자 재산으로 제 몫을 다하고 사라졌다.

만약 그 차가 지금껏 남아 내 소유가 됐으면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일이지만, 아마 폐차가 되는 운명은 비슷했을 것 같다.


차체 앞, 뒤로 커다란 범퍼와 트렁크가 있고 수동 6단 기어인 5인용 세단을 몰기에 내 운전 실력은 그리 훌륭하지 못하다(심지어 내 면허는 오토라 수동을 몰수도, 몰아본 적도 없다).

나는 좀 더 야무지고 컴팩트한 소형차가 좋다. 지금은 단종된 프라이드 럭셔리 해치백(블랙)이나 소울 부스터(단색), 혹은 아이써티같은 준중형(해치백으로) 스타일의 적당한 국산차(중고)로… 언젠가는…


그 캐피탈은 우리 가족이 누리던 마지막 단란함의 상징이었다.

80년대에 가정을 꾸려 90년대에 아파트와 자차를 마련해 중산층으로 도약할 뻔했던 평범한 가정의 모습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예상과 다르게 전개됐다.

뻔한 기승전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습성은 태생적으로 유전자에 각인됐나 보다.

잘 살 만 하면 사건사고를 하나씩 던져 시즌 그리팅을 만들어준 가족구성원 덕분에(보증!) 우리 집은 아파트에서 빌라로, 사글세로, 년세로(카드빚!) 아주 버라이어티하게 여러 번 이동했다.

이러한 가족 서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캐피탈이 있었다.


캐피탈의 차체는 희미하게 펄이 섞인 은색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진짜 그런 색이었는지 기억 속에서 미화된 건지 알 길이 없다.

캐피탈은 96년 단종되었지만 우리집 캐피탈은 내가 고등학교에 가기 전까지 우리 집 앞을 지켰다.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에는 세상 어느 곳이든지 활기에 차 있었지만 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무척이나 심란했다.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 입학은 ‘땡땡이’로, 계열이 정해지면 성적과 상관없이 지역 내 고등학교 중 무작위로 추첨되는 곳에 가야 했다.

나는 지망 학교에 입학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같은 학교에 가는 게 더 중요했다. 친한 친구들 대부분 같은 학교에 지망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1지망에 갈 수는 없었다.


그때 나에게 면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나는 은색 캐피탈과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 같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제제와 밍기뉴처럼, 나의 어릴 적 모습을 아는 과묵한 존재에게 때때로 위안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지혜야, 넌 지금 너무 과속하고 있어. 속력을 좀 줄여봐. 그게 뭔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지혜야, 너 또 차에서 자니? 엄마한테 혼났다고 자꾸 그럴거야?

이런 식의 시덥잖은 대화를 하며, 중앙로에서 시청으로, 시청에서 법원으로, 법원에서 인제사거리로, 화북으로, 삼양으로, 시내를 벗어나 동쪽으로, 남쪽으로, 어디로든지 이동하면서 자동차를 아주 내 방구석으로 삼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순간들은 미처 그게 다 준비되었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사라지고 만다. 나는 생의 여러 순간들을 겪으며 어떤 시뮬레이션도 현실보다 힘이 세지 않다는 걸 알았다.


    

96년 단종된 기아 캐피탈. 기억 속 캐피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만.. 그래도 한번 운전해보고 싶다. (사진 위키피디아)




차와 관련해서는 조금 낯설고 이상한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엄마는 나를 데리고 시장에 자주 갔다. 당시 내가 살던 도시에 대형 마트가 생기기 전, 시장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장을 볼 수 있는 소박한 광장이었다.

그곳에는 지역 특산품부터 수입산 고기, 각종 야채와 중국산 한약재, 심지어 사슴 박제가 있는 한약방과 은밀하게 입구가 난 수상한 건물도 있었다.

그 건물의 지하실에는 창살이 달린 창문이 있었고 창문 너머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전기밥솥이 보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저기 누가 사냐고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내 말을 듣지 못했거나 듣지 못한 척을 한 채 나를 데리고 서둘러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시간이 지나 그곳에 사창가가 있었고 90년대 개발 호재와 함께 그 일대가 한번 정비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그곳에 오래 살던 사람들은 그 동네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쓸쓸하고 두려운 구석이 있었다.

나 또한 그곳에 살던 사람으로서 완벽한 기억은 아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스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과 개천, 맨발로 걸어다니는 여자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즈음 나는 시장의 생선 매대 앞이나 정육점, 특히 돼지의 태아가 든 애저라든가 동물 내장이 진열된 쇼케이스를 보면 헛구역질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당시 나는 구역질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애였고 부모님은 나를 병원에 데려갔는데-내과였는지 소아과였는지 혹은 신경정신과였는지 모르겠다-그곳에서 나는 ‘비위가 약하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비위의 사전적 뜻은 ‘음식물을 삭여 내는 능력’으로 쉽게 말해 비장과 장의 균일한 능력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게 약하다는 건 내 몸 일부가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는 것, 냄새와 촉감, 물컹물컹한 동물의 사체와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선홍빛 살코기, 입을 벌리고 죽은 생선 따위를 보는 일을 힘겨워한다는 뜻이었다.

나에게 재래시장의 생물 코너는 죽음의 진열대와 같았다. 그곳에는 유치원의 연못이나 선생님, 소풍을 함께 간 친구들이 아니라 촉감과 맛을 가늠할 수 없는 생소한 재료들이 살아있던 그대로 혹은 완전히 분해되어 조각난 채 사물처럼 놓여있었다.

어쩌면 나는 사물의 비린내를 견디기 어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소박한 쇼핑이 끝나면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시장 입구의 맞은편으로 갔다. 교차로 한구석에서 곧 퇴근하고 올 아빠를 기다렸다.

당시 아빠는 6시에 맞춰 칼퇴를 했는데 가끔은 10분,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기도 했다.

엄마는 저녁 찬거리를 산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차가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내민 채 아빠의 차가 오는지 살폈다.

그때 우리 집엔 핸드폰이나 삐삐가 없었고 누군가를 만나는 약속은 무조건 사전에 미리 정해야 했다.

나는 엄마 곁에서 차도를 향해 몸을 내밀거나 바닥에 내려놓은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지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건 무척 이상한 기다림이었다.

굳이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음에도 엄마는 반드시 아빠를 기다려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아빠가 그걸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버스를 타기에 엄마의 양 손은 무거웠고 우리 집은 택시를 잘 이용하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 멀미가 심해 자동차건 버스건 탈것은 거의 싫어했는데, 기다림이 지겨워지면 엄마의 손을 이끌고 어서 집에 가자고 재촉했다.


첫 차를 생각하면 반짝거리는 캐피탈의 바디와 시장 맞은편에서 기약 없이 남편을 기다리는 한 여자가 동시에 떠오른다.

그 여자의 곁에 선 어린아이 하나도.

그때 엄마에게 차가 있었다면, 엄마도 운전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루한 도로에서 먼지와 매연을 마셔가며 언제 올 지 모르는 아빠를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텐데.

혹여나 중간에 공중전화로 사무실에 전화를 걸면 ‘금방 간다’고 하고 오지 않는 당신을, 마치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거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어떤 기다림은 설렘이나 미래가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과 어둠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마치 죽은 생선의 아가미처럼.

건물 지하실의 어두컴컴한 방처럼.


어쩌면 운전과 차에 대한 이상한 열망은 그때의 기다림에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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