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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트 Mar 04. 2022

나를 이해하는 브레이크

소설 쓰기와 운전의 공통점 



삼촌의 차는 오랫동안 길들여진 만년필처럼 부드럽고 묵직했다. 이전까지 운전해본 차는 학원 실습용인 엑센트가 전부였으므로, k5의 묵직한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왜 사람들이 세단을 선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삼촌에게 운전을 봐 줄 수 있는지 물어봤을 때 수화기 너머 약 삼 초간 침묵이 흘렀다. 이럴 때면 다소 뻔뻔한 내 성격이 다행인 듯 싶다. 삼촌은 오랫동안 교직에 있었고 나는 그게 우리의 운전 연습에 어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운전은 아는 사람에게 배우는 게 아니라는데, 삼촌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날 봐왔고 나의 면허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으니까. 



삼촌이 가지고 온 k5는 숙모와 함께 쓰는 차로, 부드러운 은색 외관에 낮은 차체가 매력적인 중형 세단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세팅을 마치고 브레이크에 발을 올렸다. 천천히 페달에서 발을 떼자 차는 느리게 앞으로 나갔다. 이전에 경험했던 소형차와는 사뭇 다른 무거움과 진중함이 느껴졌다. 그때, 브레이크는 내가 밟는 것 이상으로 나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나의 두려움과 공포,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차에게 마음이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이리에 아키의 『북북서로 구름과 함께 가라』에는 자동차와 이야기하는 케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케이는 자동차에게 말을 걸고 기분을 물으며 날씨와 도로 사정에 대해 의논한다. 케이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낡은 지프는 네비게이션도 고급 옵션도 없이 오직 경험과 감에 의해 앞으로 나아간다. 케이의 할아버지로부터 케이에게 오기까지, 지프는 아이슬란드의 수많은 길과 골목을 달리며 운전자의 욕망을 이해하고 가늠했다. 케이는 지프의 변덕스런 반응에 툴툴대면서도 차체의 흔들림과 엔진 소리, 차의 컨디션에 귀를 기울인다. 이해한다는 건 여기서부터 출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흔들림에 귀를 기울이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것. 어쩌면 삼촌의 k5는 나의 투박한 페달링과 변속에 화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왼쪽으로 돌 때는 왼팔을, 오른쪽으로 돌 때는 오른팔을 쓰는 습관을 가져.


삼촌에게 운전 연습을 요청한 이유 중 하나는 코너링 때문이었다. 운전학원에 다닐 때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어려운 부분이 바로 코너링이었다. 범퍼의 길이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매번 다른 차를 몰았기 때문일까. 긴장하면 핸들을 꽉 쥐는 버릇 때문에 때때로 어깨와 팔에 힘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지 완급 조절이 필요한데 운전에서의 힘 빼기는 이전에는 경험해본 적 없는 고차원의 생존 기술이었다.


소설을 쓸 때도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지금 당장 500매를 쓰겠어’라거나 ‘끝내주는 결말을 쓸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어’라는 다짐을 하는데, 당연히 이런 결심은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난다. 커피를 한 잔 마신다든가 갑자기 배가 고파진다든가 처음 보는 집 안(혹은 작업 공간)의 흠 때문에 청소를 하느라 소설 쓰기는 중단된다. 몸은 이토록 현명해서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고집이나 경직을 배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어쩌면 소설 쓰는 일 자체가 나를 배반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실패할 걸 알면서도 저런 결심들을 하냐고 묻는다면, 그때는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소설은 쓸 때보다 쓰기 위해 구상할 때가 가장 재밌다고들 하는데, 그건 사실이다. 특히 계시처럼 찾아오는 영감을 받고 어떤 장면이나 대사, 인물 등을 시작으로 무언가 써내려갈 때면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무아의 세계로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결코 소설 쓰기에 좋은 상태가 아니다. 그 순간이 즐거울지라도 한 순간의 환희로 소설 한 편을 쓰기에 완성은 너무 멀고 어렵다. 소설 쓰기는 100미터 달리기의 상쾌함보다 처음 보는 길에서 헤매는 산책에 가깝고, 그곳에 뭐가 있을지 쓰기 전에는 조금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베테랑들은 다르다고도 한다).



연속 커브길이 이어지는 2차선 도로는 시내 외곽의 한적한 마을을 가로질렀다. 산과 바다 사이의 경계, 그 어디쯤 위치한 마을은 잘 모르는 곳이었지만 언젠가 한 번쯤 지나쳤던 것처럼 익숙했다. 어쩌면 오며가며 그곳을 한 번은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운전을 할수록 잊어버렸다 생각했던 공간에 신속하게 들어갔다 나오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건 문장의 서술어보다 더욱 분명하고 확신에 찬 형용사 같았다.



커브를 꺾을 때는 반대쪽에서 뭐가 올지 모르니까 속도를 줄여.
너무 급하게 돌지 말고.



40킬로 이하로 서행하는 2차선의 구불거리는 코스는 예상보다 더욱 긴장되는 길목이었다. 커브 저편에서 뭐가 오는지, 안다면 언제 핸들을 돌리는 게 좋을지 사소한 질문들이 이어졌지만 답은 하나였다. 감을 익히는 것. 여러 번 해보면서 직접 감당할 수밖에 없다. 소설 쓰기처럼. 세상의 많은 일들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핸들을 쥔 손에 여유가 생겼다. 내 악력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믿는 것이야말로 나를 구동시키는 가장 큰 마력이다. 믿지 못할 때 나의 행동은 주춤거리고 노란 신호등에서 우물쭈물하다 사거리 교차로 한복판에 서 버리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믿지 못하는 것도 믿음의 한 종류긴 하다. 불신과 믿음은 차선 하나만큼이나 멀고도 가까우니까. 그러나 운전을 해보며 느낀 것 하나는 믿음도 습관이라는 것, 날 믿는 방법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를 믿는 연습. 나를 더 잘 이해하도록 수많은 연습과 훈련을 반복하는 것. 그 단순한 행위를 어째서 오랫동안 잊어버렸을까? 


커브 구간이 끝나고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직진 도로로 진입했을 즈음 오후 내내 컴컴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리는 근처에서 유명한 메밀국수집을 찾았다.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주차는 삼촌이 했다) 국수와 전병을 시켰다.


삼촌은 고향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살아왔지만 운전을 한 지는 생각보다 오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뒤 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오너 드라이버가 되었다. 삼촌이 나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 또한 그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삼촌은 어떻게 네비게이션 없이 다녀요?” 


삼촌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메밀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마치 아이들을 가르치는 말투로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길을 따라 가면 돼.” 조급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서서히, 핸들을 돌려가며 이 길로도 가 보고 저 길로도 가 보고, 그러다보면 아는 길이 나올 수도 있고 모르면 다시 돌아가면 되고…


식당 밖으로 하나 둘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더니 잠시 후,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멀끔하게 멈췄다. 해가 져 깜깜해진 저녁 공기가 무척이나 차가웠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 빛이 물 위에 떨어진 노란 물감처럼 반짝였다. 그건 마치 헤드라이트 불빛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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