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하지 않을 이유
운전을 하지 않은 지 몇 달이 지났다. 이걸 ‘운태기’라 불러야겠다.
차가 없으니 꾸준히 운전을 하기가 여의치 않다. 운전에 미쳤던 지난해에는 카쉐어링을 이용해 최소 한 달에 네댓 번 드라이브를 했는데, 해가 바뀌자 거짓말처럼 그 마음이 사라졌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전만큼 운전이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차도 없으면서 무슨 재미를 논하냘지 모르겠지만, 처음 운전석에 앉아 도로로 나갔을 때가 까마득했다.
삽시간에 홀렸다 빠져나오는 일회성 취미처럼 나는 운전에 급성중독 되었는지도 모른다.
소설 쓰기도 일종의 중독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전날 쓰던 소설을 생각하며 잠에서 깨고, 출근을 하며 다음 소설의 초안을 구상한다.
갑자기 떠오른 새 이야기의 시놉시스를 메모하고 몇 주째 쓰고 있는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떠올리며 저녁을 먹는다.
하루가 통째로 소설 쓰기, 아니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솔직히 그건 그리 행복한 상태는 아니다.
어떤 일을 꾸준히 하는 게 재능이라는데, 재능만으로 사람은 행복할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행복하지 않은 내 상태가 두려웠다. 나만 빼고 모두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그렇게 사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운전은 내가 무리해서라도 알고 싶은 ‘잘 사는 법’ 중 하나였다. 막상 알고 보니 목적보다 과정 자체가 즐겁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어딘가 가기 위해 운전을 한 게 아니라 운전하지 못하는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운전을 했다.
그 결과, 목표를 달성하고 허무해져 버렸다. 이제 나는 ‘운전할 수 있는 나’가 되었으니까.
‘등단한 나’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것처럼.
두 번째는 그간 잘 몰랐던 여러 위험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차를 몰고 렌터카 반납 장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주말 저녁, 도로는 한적했고 오가는 차는 많지 않았다. 나는 피곤과 긴장으로 40킬로미터 정도의 저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규정 속도는 60킬로였지만 도로에 차가 없어 가능했다(함부로 저속으로 달리면 위험합니다). 고가도로를 지나 대교 진입 직전, 신호등에 멈춘 교차로에서 나는 한 바이크를 발견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바이크는 내 차 뒤에서 차선을 바꾸지도 않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살폈지만 헬멧을 쓴 바이크 운전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8차선에서 6차선으로, 지하도로를 지나 다시 8차선 대교로 진입하는 와중에 바이크 한 대가 나를 앞지르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앞뒤 양옆 차선은 뻥뻥 뚫려 있었고 가시거리에는 나와 바이크뿐이었다. 백번 좋게 생각해, 바이크가 나와 행선지가 같거나 비슷한 동네에 가는 길이라고 해도 40킬로 이하로 달리는 모닝의 꽁무니를 쫓아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속도를 올리고 차선을 바꿨다(안 하는 거였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주변에 차가 없었고 (뒷유리에 붙은 ‘초보’ 스티커를 본 차들은 알아서 추월하곤 했다) 익숙한 진입로를 지나자 도로는 다시 차들의 행렬로 가득 찼다.
바이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 얘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개로 나뉘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와 ‘정말 무서웠겠다’.
전자의 반응을 듣자 실망보다 부러움이 컸다. 나도 ‘그게 무슨 상관인데’의 세계에서 살아보고 싶다. 그건 고작 바이크 한 대가 우연히 내 옆을 지나간 상황이라고,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억으로 넘겨버리고 싶었다.
중요한 건 그 이후다.
‘정말 무서웠겠다’의 세계에 한번 빠지면 그 이전으로는 쉽게 돌아갈 수 없다.
불안은 이토록 야트막하고 생생해서 조금만 헛디디면 기억은 순식간에 그날 저녁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날 나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던 심장의 감각은 여전히 생생하다.
한 번 불안을 마주치자 운전을 하는 와중에 다양하고 낯선 감각들이 나를 찾아왔다.
깜빡이 없이 추월하는 중형 세단과 외제차들(나는 압구정에서 고속도로로 나가는 진입로를 헤매 현대백화점 앞을 다섯 번이나 돈 적이 있다), 비상등을 키고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내게 창문을 열고 욕하는 운전자들(죄송합니다), 왼쪽 사이드미러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다가와 추월하는 봉고와 suv(차의 뒷좌석은 사람이나 짐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클랙슨을 울려본 적이 없다. 나 자신을 조심하는 것만으로도 도로에서의 운전은 진이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따라오는 바이크 혹은 낯선 차를 발견했을 때(물론 그 바이크는 나와 행선지가 같거나, 갑자기 40킬로 이하로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거나, 홀로 8차선에서 서행하는 경차의 뒤가 궁금했거나… 하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건 진의를 알 수 없는 위협과 공포, 그로 인한 불안과 패닉이었다.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도로 위에서 사소한 시비를 기점으로 고의로 자동차등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난폭운전이라는 개념이 있다. 난폭운전은 단 한 번이라도 상해나 폭행, 협박, 손괴가 있거나 의도를 갖고 특정인을 위협하는 순간 적용된다.
그날 바이크가 이유 없이 날 따라온 일이 난폭운전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날 내가 단 한 대의 바이크로 인해 공포를 느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차 안에서의 공포는 생각보다 더욱, 자잘하게 많았다.
가령 시동을 켜기 전이나 정차 시, 잠기지 않은 차문을 열고 낯선 사람이 차 안으로 들어온다면? 생각만으로도 경악스럽고 공포스러운데, 의외로 이런 상황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정지한 차 앞으로 행인이나 자전거, 바이크가 들이닥치는 상황은 또 어떤가. 늦은 밤이나 새벽, 지하주차장에서 주차장 밖까지 나가는 짧은 시간 동안 불안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있나? 운전자라는 이름 앞에 여성이 붙었을 때 가늠해야 할 불안들은?
상상은 나를 초월해 겪지 않았지만 겪을지도 모르는 공포를 맞닥뜨리게 한다.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불안과 공포를 감안하고도 운전을 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운전을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특히 세 번째 이유가 결정적인데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든다. 차가 있으나 없으나,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기 때문에!
카쉐어링은 반납 후 ‘주행거리X유류비’를 책정해 반드시 추가요금이 결제되는 시스템이다. 내가 돌아다닌 만큼 요금이 책정된다는 점에서 합리적인데, 비싸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편하게 차를 몰고 다녔으니 그 정도 비용은 감수해야 한다면, 맞다.
값을 치르지 않으면 경험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활동.
차 안에 있으면 불안과 안정이 함께 존재한다.
그걸 운전하기 전에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