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함께/인과 연 >
<꽃과 함께/인과 연 1>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도시로 나가 그곳에서 모든 학업을 마쳤다. 그리고 유년의 꿈이었던 꽃집아가씨가 아닌 교사가 되었다. 도시에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동안, 점차 꽃에 대한 관심은 멀어져 갔다.
그럼에도 유년기의 꽃과 자연에 대한 행복한 기억들은 내 마음 깊은 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일까? 남편과의 인연이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준 그의 어떤 말에서 시작된 걸 보면.
남편과 나는 같은 풍물패 회원이었다. 어느 날. 풍물 연습 후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모두들 흥미를 느끼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말이 내 귀에 쏙 들어왔다. 그는 제일 먼저 아이를 안고 산에 올라가 부드러운 흙을 만져보게 한 후, 향긋한 꽃향기와 풀내음, 맑은 공기를 마시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다음,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려주며 따뜻한 햇살과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점점 무뎌져가고 있던 그 옛날의 감성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켰다. 나는 곧 그에게 신뢰와 애정을 느끼게 되었고, 얼마 후 결혼을 하였다.
<꽃과 함께/인과 연 3>
일과 살림 그리고 아이 둘을 키우느라, 나의 일상은 늘 분주했다. 또다시 봄이 되자, 온 세상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쉬는 날이었던 남편이 가까운 산에 다녀올 거라며 퇴근 후 시내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저녁에 만난 남편은 봄기운에 한껏 상기된 모습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배낭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겹겹이 쌓여있는 종이를 하나 둘 벗겨내어 보여준 것은 다 시들어버린 제비꽃 한 송이였다. 혼자 산길을 걷다가 예쁘게 피어 있는 제비꽃무더기를 발견했단다. 혼자 즐기기가 아까워 시들지 않도록 여러 겹으로 싸서 조심조심 왔다고 했다. 그날 저녁, 남편이 선물한 시든 제비꽃 한 송이는 바쁜 일상 속에서 지쳐있던 나를 다시 활짝 피어나게 하는 마법을 보여주었다.
<꽃과 함께/인과 연 4>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 우연히 도서관에 들렀다가 타샤튜더의 정원에 관한 책을 보게 되었다. 책날개에는 그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화작가다. 하지만 타샤는 독특한 라이프스타일로 더 유명하다. 버몬트 주 산골에 18세 기풍 농가를 짓고 홀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옷이며, 양초, 바구니, 인형, 비누, 치즈까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되도록 직접 만들어 쓴다. 1830년대 삶의 방식을 좋아해서 골동품 옷을 입고 골동품가구를 사용하며 장작 스토브로 음식을 만든다. 이렇듯 자연적인 삶의 바탕에는 바로 정원이 있다. 30만 평의 대지에 펼쳐진 타샤의 정원은 일 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 '비밀의 화원'으로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중의 하나로 꼽힌다. 정원에 대해서는 결코 겸손할 수 없다는 타샤는 꽃과 나무에게 사랑을 쏟고 그 보답으로 아찔하도록 고운 풍경과 일용할 양식과 충분한 행복을 선물로 받는다. 타샤가 56세 되던 해부터 가꾸기 시작한 정원은 온갖 꽃들과 오래된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눈부신 향연을 펼치는 '지상낙원이 되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보다가 타샤의 아름다운 정원에 흠뻑 빠져 들었다. 이윽고 책을 덮을 때쯤이 되자, 가슴이 떨리고 쿵쾅쿵쾅 심장이 고동쳤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한동안 가슴앓이를 한 새로운 꿈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나만의 정원을 갖고 싶었다. 내 마음 가는 대로, 사계절 꽃이 지지 않는 정원으로 마음껏 가꾸어 보며. '꽃을 통해 웃는다'는 땅의 웃음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꽤 오래 품고 있었던 그 꿈은 숲 속 집으로 이사 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은퇴한 후에는 외출할 일이 없으면, 날마다 정원으로 출근한다. 정원은 나의 놀이터자 새로운 일터가 되었다.
<꽃과 함께/인과 연 5>
은퇴하고 난 첫해, 꿈을 꾸었다. 조붓한 산길을 혼자 걷고 있는데 선지자처럼 보이는 노인이 내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
" 내가 너의 미래를 3가지로 알려주겠다"
은퇴 후 나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설레기도 하고 살짝 두렵기도 하였는데 그걸 말해주겠다니, 귀가 솔깃
해졌다. 노인은 군더더기 없이 딱 3가지로 나의 미래를 말해주었다. 먼저 말한 2가지는 내게 특별하지 않았는가 보다. 꿈에서 깨어나자 바로 잊어버렸다. 마지막 한 가지가 지금도 또렷하게 귓가에 남아있다.
너는 꽃으로 해탈할 것이다.
은퇴 후 나는 정원일이 더욱 즐거워졌었다. 하루종일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밤이 오는 것이 싫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꽃을 통해 해탈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해탈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일도, 떠올릴 일도 없었다. 그리고 꽃과 해탈이라는 단어를 연결시켜 보거나 연결하여 문장을 완성해 본 적이 없다.
'뜻하지 않게 이토록 멋진 문장으로 나의 미래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놀랍고 신기하고 기분 좋은 꿈이었다.
이 꿈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운명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화두를 던져준 것 같기도 했다. 난 이 귀한 말씀을 감사한 마음으로 가슴에 꼭 품어 안았다.
그리고 가끔씩 꺼내보며 혼자 빙긋 웃는다.
네, 그래 볼게요. 꽃과 함께 잘 살아볼게요.
*라라: '즐겁고 흥겨운 삶'을 뜻하는 우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