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남편은 강릉, 아내는 제주도. 부부사이에 '숨표'를 찍다
은퇴한 부부에게 '함께'라는 말은 축복이자 때로는 숙제이기도 하다. 부부가 모두 은퇴한 후, 평온한 일상 속에서 서서히 깨달은 것이 있다. 남은 세월, 서로의 마음을 채워주면서 잘 지내려면 먼저 나 자신을 채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은 '오롯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시간이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 부부는 각자 며칠씩 강릉과 제주도로 '따로' 여행을 다녀왔다. 뜻밖에도 늘 함께 지내고 있을 때보다 각자 따로 보낸 며칠이 더 살가운 부부의 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1월 말, 남편이 불쑥 혼자서 며칠 동안 강릉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석 달 전, 함께 보낸 강릉 여행의 즐거움이 떠올라 나도 함께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남편은 짧은 침묵 끝에 이번만큼은 혼자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잠깐 서운한 마음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바꿔 흔쾌히 '오케이'를 외쳤다. 그 짧은 침묵 사이에서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은 남편의 갈증을 읽었고, 남편의 여행은 곧 나에게도 자유와 해방의 시간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여행을 떠난 뒤, 우리 부부의 시간은 각자의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강릉 바닷가를 아침, 저녁으로 걷고 있다며 틈틈이 바다 사진을 보내왔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읽고 싶었던 책에 흠뻑 빠져있기도 하고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다고 했다. 내 기분을 살필 필요 없이 오직 자신만의 취향으로 채워진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이, 나 역시도 나만의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혼자 헬스장에서 땀 흘리는 재미를 느껴보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독서삼매에 빠지기도 했다. 함께 있을 때엔 취향의 차이로 보지 못했던 영화를 실컷 보면서, 거실을 나만의 영화관으로 만들기도 했다.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인 식사를 원하는 남편 눈치 볼 필요 없이, 내 배꼽시계에 맞춰 밥을 챙겨 먹는 일도 세상 편하고 좋았다.
지난주, 이번에는 내가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고, 남편이 집에 남았다. 제주도 여행 중인 여동생이 시간 나면 오라는 말에 곧바로 제주도로 날아갔던 것이다.
오랜만에 여동생을 만나 올레길을 걷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함께 책 읽고 글 쓰고, 숙소에서는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며 마음의 고삐를 풀 수 있었다. 그 사이 집에 있는 남편 역시, 지난번 내가 그랬듯이 본인에게 가장 편안한 방식으로 마음껏 '숨표'를 찍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 같았다.
함께 있을 때의 '서로 눈치보기', '서로 맞춰주기'에서 벗어나 각자에게 온전한 방식으로 보낸 며칠은 서로의 일상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가까워지는 마법의 신비까지 보여주었다.
아침이면 카톡으로 좋은 하루를 기원해 주고, 저녁이면 얼마나 좋은 하루였는지를 사진으로 공유했다. 늘 곁에 있어 당연하게 여겼던 존재가, 여행이라는 적절한 거리를 두자 다시금 궁금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다가온 것이다.
부부가 서로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는 것은 서로에게 '숨표'를 선물하는 일이자,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상대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기꺼이 존중하는 일은 특별하고 거창한 일은 아니나,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다. 이 또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 시간을 서운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자신'을 누리는 시간으로 바꿀 줄 아는 건강한 독립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은퇴 후 우리 부부가 터득해 가는 '따로 또 같이'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 진화해 나갈 것이다. 언제든 필요할 때면 '여보, 나 며칠 여행 다녀올게'라고 눈치 안 보고 외칠 것이다. 나를 채우는 시간이 결국 상대를 채워줄 에너지가 된다는 사실을 이젠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까.
서로에게 필요한 '숨표'를 건네며 오래도록 함께 걷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