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시간을 깊게 만든 뜻밖의 방법

서로 물어보고 들어주는 시간

by 숲song 꽃song

독립하여 각자의 삶을 꾸려가던 아들과 딸이 연말연시를 함께 보내기 위해 장수산골 집으로 모였다. 은퇴 이후 부부 둘만의 시간이 익숙해질 즈음, 이렇게 가족이 다시 모이는 자리는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바쁜 일정 속에서 어렵게 맞춘 1박 2일.

오고 가는 시간을 빼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사실상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가족 단체대화방이 분주해졌다. 무엇이 먹고 싶은지, 그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에 대한 메시지가 오갔다. 딸은 홍어 삼합과 등갈비찜을, 아들은 '감바스 알 아히요'를 먹고 싶다고 했다. 류미큐브 게임도 좋고,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도 좋고, 짧은 시간 어딜 돌아다니는 것보다 집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자는 의견도 나왔다. 메인 메뉴인 홍어삼합과 등갈비찜은 내가 준비하기로 했고, 딸은 감바스 알 아히요와 뱅쇼 재료를 챙겨 오겠다고 했다. 남편은 삼합에 곁들일 막걸리를 멀리서 주문했다. 모두들 오랜만의 가족 모임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모이기 이틀 전, 늦은 저녁 시간에 35개의 질문이 담긴 질문지와 함께 딸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먹고 마시기만 하긴 아쉬우니까 미션 하나 할까요?"

우연히 인스타그램 계정 '히스토핏'에서 한 해를 돌아볼 수 있는 질문지를 보았다며,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서로의 한 해를 묻고 답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딸과 아들이 성장하여 독립해 지내다 보니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서로의 마음과 시간을 자세히 알기 어려웠다. 각자 어떤 마음으로 한 해를 살아왔는지 말하고, 또 들어주는 시간이 의미 있을 것 같아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연말 저녁, 오랜만에 모인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해졌다. 한쪽에서는 아들이 감바스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딸이 멀드 와인을 끓였다. 미리 준비해 둔 음식들과 아이들이 만든 요리가 상 위에 오르자 제법 푸짐한 한 상이 완성됐다. 맛있는 음식과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들, 그리고 이 시간이 모두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곁들여지며 식탁은 금세 온기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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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막걸리~ 한 잔, 가족 완전체의 온기 가득한 상

식사를 마친 뒤, 딸의 진행으로 '한 해 돌아보기 질문 시간'이 시작됐다. 규칙은 간단했다. 35개의 질문을 참고하여 한 사람씩 돌아가며 질문 하나를 선택해 이야기하고, 나머지 가족은 각자 한두 개씩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공통 질문에 답하면 된다. 공통 질문은 '내년에 바라는 점'과 '오늘 이 자리 한 줄 소감'이었다.

우리가 참고한 35개의 질문은 총 7개 영역('2025년을 추억하며', '일상﹠라이프', '관계﹠사람', '웃픈 순간', '의미 있었던 순간', '스스로 돌아보기', '이 자리를 축하하며'), 5개씩의 질문들로 이루어졌으며 생각보다 깊었다.

올해 가장 열심히 보낸 달은?
올해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올해 왜 그랬지 싶었던 흑역사는?
올해 나 스스로 대견했던 순간은?
올해 인간관계에서 배운 점 하나는?
새로 생긴 습관과 사라진 습관은? 등.

남편부터 시작해 차례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동안 서로 모르고 지나쳤던 마음들이 조심스럽게 하나 둘 꺼내졌다. 혼자 버텨 온 시간들,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나온 날들, 자랑스럽고 대견했던 순간들, 엉켰던 실타래를 차분히 풀어낸 이야기들….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 그런 마음이었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장면들이 여럿 있었다. 곁에서 함께 살아가면서도 몰랐던 남편의 마음을 새삼 다시 들여다보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끝나면 잠시 정적이 흘렀다. 평소라면 불쑥 튀어나올 법한 섣부른 질문 대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랬구나"라는 짧은 말이 조심스럽게 오갔다.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조심스럽게 건너가기 위한 다리처럼 느껴졌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쉽게 짐작하고 넘겼던 시간들 속에, 각자의 싸움과 성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지막 마무리로 모두 돌아가며 '오늘 이 자리한 줄 소감'과 '내년에 대한 바람'을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새해를 맞이하는 기대와 응원의 마음이 뒤따랐다. 질문 몇 개로 가족의 시간이 이렇게 깊어질 줄은, 시도해 보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한 해를 살아왔다는 사실이 고맙고 안쓰러워 살짝 눈물을 비쳤던 것도 같다.


성인이 된 자녀들이 독립하고 우리 부부가 모두 은퇴한 이후, 우리 가족은 '따로 또 같이'의 의미를 다시 배우고 있다. 어느 해보다 잘 정리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을 느낀, 2025년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omn.kr/2gkv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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