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삶의 마지막을 선택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장기기증 등록 후 은퇴부부의 작은 변화

by 숲song 꽃song


창문을 열자, 데크와 마당 위에 하얗게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 뚝 떨어진 기온에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이 실감 났다.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며칠 전 남편이 꺼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 때문이었을까. 아직은 멀었다는 막연한 안심 때문이었을까. 오래전부터 함께 실천하자고 약속했지만 번번이 미뤄졌던 일. 삶의 마지막 결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약속을 남편이 오랜만에 다시 꺼낸 것이다.

"여보, 요즘 들어 내 정신이 자꾸 깜박깜박해요. 우리가 예전에 신청하자고 했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랑 장기기증 등록을 올해가 가기 전, 정신이 또렷할 때 해두는 게 좋겠어요."

아무런 설명 없이 느닷없이 꺼낸 말에 놀라서 그렇게 말한 연유를 물었다. 남편은 이틀 전 카센터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계산할 때 허둥대지 않으려고 신용카드를 미리 꺼내어 챙겨 두었단다. 정작 계산하려는 순간 아무리 찾아도 카드가 보이지 않아서, 급기야 주변 사람들이 다 함께 찾아보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한참 뒤에야 카드는 바지 주머니에서 나왔고, 남편은 멋쩍게 웃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말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걱정과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눈이 내린 날 생각난 김에, 곧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과 장기기증 희망자 등록신청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삶의 마지막을 타인의 결정에 맡기지 않고, 정신이 또렷할 때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결심이었다. 부부가 함께 가서 신청하면서 그 과정과 의미를 나누고 싶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각자의 시간에 맞춰 따로 다녀오기로 했다. 은퇴 후 우리의 일상처럼, 이번 선택 역시 '따로 또 같이'였다.


내가 살고 있는 장수 지역에서는 장수군 보건 의료원이 가장 가까운 등록 기관이었다. 사전연명의료상담실에서 신분 확인을 마친 뒤 전담 직원의 설명을 듣고, 충분히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질문에 대답한 뒤 서명을 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란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는 제도로, 향후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 자신의 연명의료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사를 문서로 밝혀두는 것이다. 보건 복지부가 지정한 등록 기관을 직접 방문해 신분증으로 본인 확인을 하고,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 작성하면 된다. 비용은 들지 않으며, 이후 언제든 변경이나 철회도 가능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절차>

뒤이어 신청한 장기 및 조직 기증 희망자 등록은 오래전부터 공감해 온 일이었지만, 막상 신청을 하려고 하니 마음 한편에서 살짝 두려움이 올라왔다. 사후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가족의 동의는 필요한지, 장례에는 지장이 없는지 같은 현실적인 걱정 때문이었다. 전담 직원이 내가 궁금해하는 내용에 대해 차분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장기 기증은 사망 판정 이후에만 진행되며, 가능한 한 신체 훼손을 최소화해 고인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것. 기증 후에도 시신은 정중하게 수습돼 일반 장례와 동일한 절차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또한 생전에 등록을 했더라도 실제 기증 여부는 유가족에게 다시 한번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며, 등록 이후에도 언제든 변경이나 철회가 가능하다는 점도 덧붙였다. 설명을 듣고 나니, 장기 기증은 누군가의 삶을 살리는 행위이자,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뜻을 존중하는 과정이라는 점이 새삼 또렷해졌다. 장기 및 조직 기증 희망자 등록 신청 절차 역시 의료 기관 방문이나 온라인을 통해 비교적 간단하게 진행할 수 있다. 상담 후 신청서에 기증 범위(장기, 조직, 안구 등)를 선택하고 서명한 후 신청이 완료되면 며칠 뒤 등록증이 우편으로 배송된다.

<장기 등 및 조직 기증희망자 등록신청서>

어렵고 무거운 결정을 상상했지만 과정은 차분하게 진행되었고 무엇보다 '강요'가 아닌 '선택'이라는 점, 언제든 변경이나 철회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마음이 놓였다. 문서에 서명하는 순간, '죽음을 준비한다'기보다는 삶의 마지막까지 자기 결정권을 지킨다는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다.

모든 절차를 마치자 전담 직원이 작은 선물과 함께 장수군에서 장기기증 희망 등록자에게 제공하는 혜택이 적힌 안내문을 건넸다. 장수 한누리전당 수영장과 헬스장 이용료 50% 감면 등 지역 시설 이용 혜택 안내가 포함되어 있었다(감면 대상 및 적용 기준은 지자체별로 다를 수 있어 관련 기관 확인을 권한다).

나는 원래 실내 운동보다 숲 길 걷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장수의 겨울은 눈이 잦아 걷기 운동이 쉽지 않다. 마침 헬스장 등록을 고민하던 차에, 뜻밖의 선물처럼 할인 혜택이 따라왔다.


그날 저녁, 남편과 각자 의료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루었던 일을 드디어 마무리할 수 있어 후련하다는 말과 함께 새끼손가락을 걸며 한 가지를 약속했다.

"이제 당신과 나의 몸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네요. 작게(장기기증)는 9명, 많게는 백 명(조직기증)에게 새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귀한 몸이 되었어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각자 몸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잘 관리하기로 해요."

며칠 뒤 장기기증 등록증이 우편으로 도착하자마자 1년 치 헬스장 등록을 마쳤다. 장기기증 등록자 할인 혜택을 적용받으니 1년 이용료가 9만 6천 원이었다.


세밑, 삶의 마지막에 대한 중요한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동시에 '내 몸'을 대하는 태도도 변하였다. 막연히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제 내 몸은 책임감을 느끼며 돌봐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달라졌다. 요즘 우리 부부는 특별한 외출이 없는 날이면 오전 한나절을 헬스장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운동을 한다. 따로 또 같이 실행한 우리 부부의 삶의 마지막에 대한 선택은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일로 그치지 않고 지금의 삶을 더 귀하게 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올해 우리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편으로 보내온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 옆에 적혀 있던 글귀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톨스토이는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죽음에 대해 미리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아직 꺼려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하기 이전에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개인적으로 매우 큰 불행일 겁니다.


*이 글을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omn.kr/2gj3w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송년의 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본 적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