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주 힘들어야한다. 그러나 죽지않아야 한다
감기 기운이 길게 이어졌다. 며칠째 기침이 멈추지 않자, 몸뿐 아니라 마음도 함께 축 쳐져갔다. 이럴 땐 약보다 먼저 땀을 빼야 한다는, 나만의 근거 없는 확신이 생긴다.
“여보, 오늘은 암마이봉 한 번 올라가요. 땀을 한 번 쭉 빼면 좀 힘이 날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겠냐”라고 묻던 남편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나갈 채비를 하였다.
◆오늘 잡아야 할 두 마리 토끼
오전 : 마이산 남부 주차장-마이산 탑사-은수사-천왕문-암마이봉 등산-북부주차장 방면 사양저수지
오후 : 책 읽기( 마이산 북부주차장 방면 사양저수지 뷰 식당 겸 카페)-천왕문-은수사-탑사-남부주차장
◆오늘 읽을 책 : 옆집 아내 ➪ 편안함의 습격(마이클 이스터/수오서재), 옆집 남편 ➪ 혁명가 붓다(법륜/숨)
◆오늘의 토끼 사냥법 : '흠뻑 땀 흘려 감기를 떨쳐라', '따로 또 같이', 아주 힘들어야 한다. 그러나 죽지 않아야 한다'
마이산은 두 개의 봉우리가 말의 귀처럼 마주 서 있다.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그중 오를 수 있는 건 암마이봉이다. 마이산 남부주차장에서 출발해 암마이봉 등산 입구인 천왕문을 향해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마이산 탑사가 나온다. 시멘트 한 줌 없이 쌓아 올린 돌탑들. 수십 년을 바람과 비에 내맡긴 채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은 볼 때마다 항상 경이롭다. 돌탑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다. 이 탑들이 무너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던 건 바람과 비를 잘 피해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흔들림을 견뎌내며 더욱 단단히 중심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돌탑들이 수많은 세월을 비바람에 버텨왔듯, 오늘은 힘들어도 나도 한번 제대로 버텨보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출발한다.
탑사에서 다시 조금 더 올라가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은수사가 나온다. 그곳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640살 먹은 청실배나무가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마이산을 찾아 기도를 마친 뒤 증표로 심은 씨앗에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다. 마침 여기저기 떨어진 배가 눈에 띄어 하나를 주워 베어 물었다. 싱그러운 향이 퍼지며 들큼한 맛이 느껴졌다. 발걸음은 이어서 자연스럽게 법고 앞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북을 치며 소원을 빌 수 있다. 여기 올 때마다 늘 그렇듯 남편이 큰 법고 앞에 서더니 둥, 둥, 둥 세 번 북을 울린다. 나도 자동적으로 북소리에 맞춰 두 손을 모으고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행복하라’는 기원과 함께 세 번 허리 숙여 절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행복하라.’
법정 스님이 쓰신 책 속의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이직을 준비하느라 애쓰는 아들과 바쁜 직장생활로 늘 동동거리며 지내는 딸, 홀로 지내시는 양가 부모님, 큰 욕심 없이 지금처럼 살고 싶은 우리 부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을 위한 기원이 들어 있다.
요즘 막 읽기 시작한 책, 『편안함의 습격』에서 저자는 말한다. 인간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완전한 안락이 아니라 의미 있는 불편함이라고. 나의 기원도 어쩌면 그와 비슷하다. 삶이 전혀 힘들지 않기를 비는 것이 아니라, 힘들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잘 이겨내어 저마다 자신의 생명을 마음껏 노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은수사 옆을 돌아 324개의 계단을 오르면 암·수마이봉 사이의 고갯마루, 천왕문에 이른다. 이곳에서 암마이봉의 진짜 오르막이 시작된다. 평소 ‘따로 또 같이’를 외치는 부부답게, 등산 초입에서 남편에게 나는 내 속도에 맞게 올라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올라가시라고 했다.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앞서 걷는 남편 뒤를 따라 힘차게 첫발을 내디뎠다.
70도가 훌쩍 넘어 보이는 경사에 철계단과 암릉이 번갈아 이어졌다. 보통 때였더라면 이 정도의 등산쯤이야 큰 무리는 없었겠지만 감기로 약해진 몸은 금세 신호를 보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다리는 힘이 풀려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그만 내려갈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라 생각하고 한걸음만 더 내딛자며 발걸음을 붙잡았다.
심장은 터질 듯 뛰고 허벅지와 종아리는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지만, 딱 한 발만, 딱 한 계단만 하며 내딛다 보니, 어느 순간 암마이봉 정상 표지석 앞이다.
몸은 힘들었지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표지석 앞에 서니, 뿌듯함과 안도가 마음을 가볍게 했다. 이내 내려가는 길은 발걸음이 춤을 춘다. 다시 암·수마이봉 사이의 고갯마루 천왕문으로 내려와서 북부주차장을 향해 508개의 계단을 내려간다. 그 아래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호수뷰의 식당 겸 카페가 있다. 거기서 점심을 먹고 한나절 책을 읽다가 되돌아가려고 한다.
남편이 펼쳐든 책은 법륜스님의 『혁명가 붓다』, 내가 펼친 책은 마이클 이스터의 『편안함의 습격』.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책이다.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치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이 1부. 타이틀 문장이다. 이미 보았던 문장이건만 조금 전 암마이봉을 오를 때의 고통과 뿌듯함이 책 속의 문장과 오버랩되면서 처음 만난 문장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아주 힘들어야 한다. 그러나 죽지 않아야 한다.”
저자는 이 문장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는 정확한 경계선을 말한다. 너무 편하면 무너지고, 지나치게 힘들면 부서진다. 그러니 딱 그 사이, 무너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을 만큼 최대한 가 보라고.
감기를 떨치겠다는 단순한 이유로 오른 암마이봉이었지만, 결국 오늘 읽으려던 책의 핵심문장을 몸으로 먼저 읽은 셈이다.
살다 보면 또다시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암마이봉의 기억이 딱 한 걸음만 더 내디뎌 볼 용기를 건네줄 것 같다
흠, 오늘은 대체… 몇 마리 토끼를 잡은 걸까.
걷고 읽고는 기본, 땀 흠뻑 흘리며 감기를 떨칠 용기를 냈고, 흔들리는 마음의 중심을 붙잡았고, 삶이 흔들릴 때마다 한걸음 더 내딛을 용기를 주는 문장을 얻고 ….
*오마이 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