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단골 바다 정원이 생겼다

14화. 새만금 고속도로가 열어 준 산골 은퇴 부부의 서해 산책

by 숲song 꽃song


좋은 길은 사람을 자꾸 밖으로 불러낸다.

깊은 산골에 사는 우리 부부에게, 탁 트인 바다와 바다 위로 해 지는 풍경은 이제 먼 그리움이 아니다. 길은 늘 열려 있고,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마음이 동하는 날이면 우리는 가볍게 말을 건넨다.

“여보, 오늘 바다 한번 보고 올까요?”

예전처럼 1박이상 여행 계획을 세우고 집안 단속을 단단히 해 놓은 뒤 길을 나설 필요도 없다. 그저 마음이 움직이는 날, 훌쩍 다녀오면 되는 일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10년 전 도심을 떠나 장수 산골로 귀촌했다.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고, 숲이 양팔로 집을 감싸 안는 곳에서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삶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다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 산간 지역이라, 탁 트인 바다와 바다 위로 번지는 저녁노을을 쉽게 볼 수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오작교가 하나 놓였다. 지난해 11월, 익산-장수고속도로와 서해를 잇는 새만금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다.


김제 진봉면에서 완주 상관면까지 이어지는 55.1km 구간. 기존 고속도로망과 연결되면서 장수 산골에서도 서해안 부안 일대와 선유도, 장자도, 고군산군도를 훨씬 수월하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운전 시간도 단축되었지만 운전 피로도가 확연히 줄었다. 이전에는 고속도로와 국도를 번갈아 타며 신호등을 여러 번 지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새만금고속도로 개통 후엔 달라졌다. 신호등 한번 거치지 않고 쭉쭉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새만금 방조제에 닿고, 눈앞에 서해 바다가 펼쳐진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왼쪽은 부안 변산·격포, 오른쪽은 선유도·장자도로 이어진다. 어느 쪽을 향하든지 하루 안에 바다와 노을을 충분히 즐기고 돌아올 수 있다.


새만금고속도로가 놓이면서 우리 부부의 일상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큰맘 먹어야 나설 수 있던 바다가 이제는 마음 내키는 날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부담 없이 드나들어도 좋은 단골 바다 정원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고속도로 개통 이후, 우리는 부안과 선유도, 장자도, 고군산군도를 여러 차례 다녀왔다. 변산 마실길을 걷고, 전나무 숲과 대웅전 창살문이 아름다운 내소사를 찾았다. 개암사 뒤편 울금 바위길과 산 능선을 걸었고, 곰소 해안길을 드라이브했다. 선유봉과 장자봉에 올라 고군산 군도 조망을 즐겼고, 장자도에서 배 타고 관리도와 말도·명도를 트레킹 하며 섬 바람을 맞았다. 어느 날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가, 서해 낙조에 마음까지 붉게 물든 채 돌아오기도 했다. 자칫 단조롭게 흘러갈 뻔했던 지난 석 달 (12월, 1월, 2월), 산골의 긴 겨울이 덕분에 한층 풍성해졌다.


며칠 전에는 윤슬이 일렁이는 봄 바다가 보고 싶어 다시 선유봉을 찾았다. 해발 112m에 불과하지만, 정상에 서면 고군산 군도의 실루엣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선유봉의 암릉 구간은 백패킹을 즐기는 사람들의 '최애' 장소라는 것을 이번에 가서 처음 알았다.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하다.

우리는 봄 바다 위에 흩뿌려진 윤슬에 취해 두 시간 넘게 정상에 머물렀다. 아쉬움을 다음으로 미루고 내려온 뒤에는 책을 읽고 서해 낙조를 보려고 부안 변산 바다 전망 카페로 이동했다. 나는 실내에서 책장을 넘기다 바다를 바라보다가 봄 졸음에 빠졌고, 남편은 바람 부는 야외 탁자에 앉아 바람이 넘겨주는 책 읽기 삼매에 들었다.

해가 기울자, 서해 특유의 깊고 느린 노을이 우리를 자연스레 한 자리에 머물게 했다. 붉은빛이 바다를 물들이고, 하늘과 수평선이 한 몸이 된 채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까지,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모든 풍경을 하루 안에, 무리 없이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새만금 고속도로는 우리에겐 단순한 도로망 확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산골 은퇴부부의 일상에 새로운 여유와 자유를 선물해 준 것이다.


앞으로의 은퇴 생활도, 이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어가 보려 한다.

산이 부르면 산으로, 바다가 그리우면 바다로



이 글을 오마이 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

https://omn.kr/2h8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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