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마이산 줄넘기 길에서 변산 바람꽃을 만나다
며칠 전 하루 종일 봄비가 내렸다. 잘고 길게 내린 비는 땅속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뭇 생명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다음 날 아침, 말짱하게 개인 하늘을 보니 몸속의 핏톨들이 팽팽하게 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날은 어디든 나가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남편과 함께 전북 진안의 마이산으로 향했다. 우리가 자주 걷는 길. 내가 마음대로 이름 붙인 '마이산 줄넘기 코스'를 걸으려는 것이다. 마이산 남부주차장에서 출발해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 고개를 넘어 북부 주차장 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이다. 마치 줄넘기를 하듯 한 번 넘어갔다 돌아오는 코스라 그렇게 부른다. 땀을 흠뻑 흘리며 고개를 넘어가 점심 먹고, 카페에서 책을 읽은 뒤 다시 땀 흘리며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함께 개운해지는 하루 코스다.
봄비가 충분히 내렸으니 혹시 봄 야생화라도 세상 구경을 나왔을까 싶어 주변을 둘레둘레 살피며 걸었다. 나뭇가지마다 잎 눈과 꽃 눈이 제법 도톰하게 올라와 있었다.
'한 달쯤 지나면 툭툭 잎이 터지고 꽃들이 벙글겠지.'
상상만으로도 얼핏 봄을 먼저 만난 듯 기분이 좋아졌다.
탑사를 지나 은수사를 지나면 마이산 고개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온다. 최근 시작한 파워 스트레칭 때문인지 다리에 근육통이 심해 몇 걸음 오르다 쉬어야 했다. 꾸준히 운동해 온 남편은 성큼성큼 쉬지 않고 올라갔다. 어차피 따라잡을 수 없다면 '따로'가 낫다 싶어 마음 편히 뒤처지기로 했다.
몇 계단 오르다 보니 계단 옆 산기슭에 '마이산 지질 명소에 사는 꽃들'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혹시 지금 쯤 피는 봄꽃이 있을까 하는 기대에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고깔제비꽃, 구슬붕이, 단풍제비꽃, 때죽나무, 얼레지, 큰 개별꽃, 큰 괭이밥, 생강나무, 현호색….
익숙한 이름들 사이에서 눈길을 붙잡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바람꽃. '마이산에 바람꽃이 있다고?'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바람꽃은 야생에서 꼭 한 번 자연스럽게 만나보고 싶던 꽃이었다.
오래전 함께 근무하던 선배 교사 한 분이 생각난다. 그는 이른 봄이 되면 변산 바람꽃을 보러 간다며 자신만 아는 장소로 바람처럼 훌쩍 떠나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처음 들어 본 그 꽃이 궁금했다. 어느 해 봄, 큰 용기를 내어 "저도 한번 따라가도 될까요?"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정중한 거절을 받았다. 조용한 성품의 그는 아마도 일 년을 기다려 온 그 꽃을 혼자 조용히 보고 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돼 서운하지는 않았지만, 바람꽃에 대한 궁금증과 갈증은 오히려 더 커졌다.
귀촌 후 꽃밭이 생기자, 변산 바람꽃은 아니지만 바람꽃 종류의 모종을 사다 심어 보았다. 환경이 맞지 않았는지 꽃도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바람꽃이 지금 내가 서 있는 마이산 어딘가에 살고 있단 말이지.'
이 근처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폈다. 바로 그때였다. 낙엽 사이에서 작은 흰 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만 보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다. 급히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니 틀림없는 변산 바람꽃이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너무 기뻐 팔짝 뛰다가 남편에게 보여주려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이미 계단 위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 예쁜 것을 못 보고 그렇게 빨리 올라가 버릴 건 뭐람.' 남편과 함께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다시 돌아올 때 볼 수 있으니 괜찮다. '그래, 나 혼자라도 실컷 보다가 가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야생의 변산 바람꽃.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눈으로 찍고, 사진으로 찍고, 그저 바라보면서 "어머, 어머"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그때 다정한 중년 부부 한 쌍이 손을 잡고 내 옆을 지나갔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며 혼자 웃고 사진을 찍어대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손을 꼭 잡고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잠깐 부러울 뻔했지만, 다시 눈앞의 바람꽃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금세 휘발돼 버렸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오면서 바람꽃 봤어요?"
남편은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야생화에 큰 관심이 없고, 바람꽃을 알지 못하니 낙엽 속 작은 꽃이 눈에 들어왔을 리 없다.
문득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남편과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고개 너머 카페에 앉아 책을 꺼낸 뒤, 남편에게 변산 바람꽃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발견한 기쁨을 다시 이야기했다. 남편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빨강머리 앤처럼 기쁨과 아름다움은 크게 표현할수록 더 커진다고 믿는 나와 달리, 남편은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속으로 음미하는 편이다.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 그것 또한 우리 부부의 또 다른 모습이다.
마이산 고개를 넘어 다시 돌아오는 길. 남편이 걸음을 늦추며 주변을 살폈다. 사진을 보여준 덕분인지 바람꽃을 쉽게 찾아냈다. 그리고 발길을 멈추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처럼 크게 기뻐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남편도 속으로는 무척 반가웠나 보다.
아마 내년 봄, 이맘때 쯤이면 우리는 이 날을 떠올리며 다시 이 길을 찾을 것이다.
'그때도 우리 부부는 지금처럼 '따로 또 같이' 걷겠지. 변산 바람꽃을 만나면 나는 또 크게 소리치며 기뻐할 테고, 남편은 말없이 오래 바라보겠지.'
남은 세월, 표현 방식은 달라도 그렇게 작은 것에도 함께 기뻐하며 잘 나이 들어가고 싶다.
<참고> 변산바람꽃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야생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 가운데 하나다. 보통 2월 말에서 3월 사이 눈이 녹기 시작할 무렵 숲 속 그늘진 곳에서 꽃을 피운다. 꽃잎처럼 보이는 흰색 부분은 실제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며 가운데 노란 꽃술과 자주색 꽃밥이 특징이다.
이 꽃은 전북 변산반도에서 처음 발견되어 ‘변산바람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키는 10~20cm 정도로 작지만 낙엽 사이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다만 꽃이 매우 작고 연약해 자생지가 쉽게 훼손될 수 있어, 꽃을 만났을 때는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