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쑥전에 막걸리 한잔, 들판에서 데려온 계절
헬스장을 다녀오는 길, 햇살 가득한 논밭을 바라보니 마음이 들썩거렸다. 날이 풀렸으니 텃밭과 꽃밭도 정리해야 하고, 당장 내일모레 독서 토론할 두툼한 책도 마저 읽어야 하건만 마음은 자꾸 들판으로 달려갔다.
남편에게 웃으며 물었다.
"여보, 이렇게 좋은 날에 제가 머리에 쥐가 나는 책이나 붙들고 있어야 할까요?"
독서토론을 위해 읽고 있는 책은 '판타 레이', 목침으로 써도 될 만큼 두껍다.
"우리 점심 먹고 쑥이나 캐러 갈까요? 덕산제 근처로 가서 당신은 호숫가 걷고, 나는 쑥 캐고."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래 쭈그리고 앉는 일을 못하는 남편에 대한 배려를 슬쩍 얹은, 꽤 계산된 제안이다. 좋다 싫다는 말은 없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보니 이미 허락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 번 더 밀어붙인다.
"이런 날은요, 꼭 쑥이라도 뜯으면서 봄을 맞아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오늘 저녁은 쑥국에 쑥전, 딱 어울리잖아요."
점심을 먹고 한숨 돌린 뒤, 집을 나섰다. 가까운 곳을 두고 일부러 조금 멀리 나간다. 들 소풍 기분을 내고 싶어서다. 봄볕 아래서 마실 커피와 간식도 챙겼다. 평소엔 잎차나 드립 커피를 마시지만, 이 날은 남편이 좋아하는 달달한 믹스 커피다. "내가 쑥 캘 것도 아닌데 꼭 같이 가야 하냐"라고 묻지 않고 따라나서는 마음이 고마워서다. 덕산제를 한 바퀴 돌며 쑥을 찾아봤지만 오잉? 쑥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마른 억새만 무성하다. 봄이 더디 오는 장수 산골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다.
결국 자리를 옮겨 의암호로 향했다.
"여보, 여기 쑥 많아요! 저는 여기서 쑥 캐고 있을 테니 당신은 혼자 잘 놀고 계세요."
바구니를 들고, 어느새 그 옛날 '쑥 캐던 소녀'가 되어 깡충거리며 자리를 잡는다. 가만히 보니 쑥은 아직 어리다. 그래도 제법 큰 것들을 잘 골라가며 칼로 콕콕 캐내기 시작한다. 쑥을 캐는 일은 나만의 봄맞이 통과의례다. 내 손으로 쑥을 캐어 쑥국을 끓여야 비로소 봄을 제대로 맞이한 기분이 든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 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동요 <봄맞이 가자> 중에서
잊고 있던 동요가 쑥을 캐는 손놀림에 맞춰 저절로 흘러나온다. 어린 시절, 이맘때면 동무들과 온 들판을 헤집고 다니며 쑥을 캤다. 우리가 부르던 동요는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고, 우리는 메아리로 동요를 다시 들으며 깔깔 웃었다.
쑥을 캐던 들판에는 누가 더 많이 캐나 은근한 경쟁이 있었다. 바구니 안의 쑥을 들썩들썩 부풀려 많아 보이게 하던 얕은 꾀도 있었다. 동무의 바구니가 엎어지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 틈에 손을 더 바쁘게 놀리던 못된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가득 채운 바구니를 들고 자랑스럽게 집에 가면 기대했던 칭찬 대신 늘 엄마의 한마디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구, 잘 다듬어가며 캐왔어야지. 다 새로 다듬어야 쓰겄네."
입은 삐죽 튀어나왔지만 내 손으로 캐온 쑥이 나는 마냥 뿌듯했다.
"쑥, 이제 먹을 만하게 컸는가?"
지나가던 어르신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신다.
"아직 좀 어려요."
"어린 쑥이 더 맛있어. 캐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맞아요. 호호."
한참을 캐고 보니 바구니가 제법 찼다. 무릎과 허리를 세워 자리를 옮길 때마다 "아고고" 소리가 절로 난다. 마음은 여전히 소녀 같은데, 몸은 건너온 세월을 숨기지 않는다. 더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는 끙끙 앓을 것 같아 한 끼 먹을 만큼에서 멈추기로 한다. 남편은 차 안에서 의암호 봄 풍경을 즐기고 있다. 나는 예전에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남편에게 자랑스럽게 바구니를 내민다.
"봐요, 나 이만큼 캤어요."
"그새 이렇게 많이?"
남편의 한마디에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차 안에서 의암호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잔. 때로는 이처럼 작은 것들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집에 돌아와 말갛게 헹군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쑥국을 끓였다. 엄마에게 배운 그 방식 그대로다. 남은 쑥으로는 쑥전을 부치고 막걸리를 한 잔 곁들였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함께 쑥을 캐던 동무들도 어디선가 나처럼 쑥바구니를 들고 있을까?
내가 캐온 것은 쑥이 아니라 그 시절의 봄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