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홍매화 보다 오래 남은 장면, 구층암에서 들은 남편의 이야기
3월 25일(수), 홍매화가 이번 주 절정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남편과 함께 구례 화엄사로 향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인파가 몰린다는 말에 망설이다가, 처음으로 큰마음을 먹고 때를 맞춰 나선 길이다. 화엄사가 주관하는 ‘홍매화·들매화 사진 콘테스트’ 촬영 기간이 4월 5일까지로 연장되면서 평일임에도 사진작가들로 붐빌까 염려되었다.
화엄사 바로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전 6시 50분, 예상과 달리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줄지어 선 수선화가 노란 웃음꽃을 피우며 방문객을 맞이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래도 한산한 분위기였다.
홍매화 주변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각황전 뒤 산기슭에는 묵직한 카메라를 든 사진작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품 사진을 찍으려는 듯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였다. 사진 콘테스트와는 무관하게 꽃을 보러 왔지만, 눈앞의 풍경 앞에서 나 역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구도를 잡아보겠다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안, 남편은 소리 없이 자기만의 자리를 찾아 꽃을 음미했다. 이제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따로 또 같이’가 이루어진다.
오전 7시 30분쯤, 갑자기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스님들이 마당을 쓸며 홍매화 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비질 소리와 함께 스님들이 나타나자, 현장은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다. 이어 셔터 소리만 연이어 울렸다.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진작가들과 달리,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느라 촬영 타이밍을 놓쳤다. 뒤늦게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사진작가들이 주로 모여 있던 자리에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듯한 반응이 들려왔다. 공들여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온 사람과 단순히 풍경을 즐기러 온 사람 사이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 ‘홍매화·들매화 사진 콘테스트’는 총상금 1000만 원 규모로, 전문가 부문과 일반인 휴대전화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된다고 했다. 현장에는 저마다의 시선으로 홍매화를 담아내려는 이들의 모습이 또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한 시간 반가량 그곳에 머문 뒤, 대웅전 뒤편 ‘들매화 촬영지’로 이동했다. 안내판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화엄사에 딸린 암자 중 가장 가까운 구층암에 도착한다.
시누대 오솔길을 따라 구층암으로 오르는 길, 남편이 말했다.
“스물두 살 때, 여기 구층암에서 6개월 정도 지낸 적이 있어.”
대학 시절 휴학 후 화엄사 어느 암자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곳이 바로 구층암이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차 머물렀던 곳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남편의 스물두 살 청춘 시절로 이어지는 길처럼 느껴졌다.
구층암 뒤에서 만난 들매화는 홍매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듬성듬성 피어 있는 흰 꽃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막 눈부신 홍매화를 보고 난 후여서 그랬을까,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내판을 통해 이 나무가 자연적으로 발아한 토종 매화이며, 수령이 약 450년에 이르고 학술적 가치가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들매화의 인상이 달리 보였다. 스물두 살, 병을 이겨내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남편의 모습과 겹치며 인위적인 손길 없이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에서 강인한 생명력과 시간의 깊이가 느껴졌다. 이곳은 홍매화 주변과 달리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았다. 잠시 둘러본 뒤 돌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안목이 있는 사진작가들이 들매화의 숨은 아름다움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담아낸다면 사진 대회에서도 더 큰 호평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 해보았다.
남편이 머물렀다는 구층암에는 350년 된 모과나무를 그대로 활용한 유명한 기둥이 있었다. 1936년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한 것으로, 남편 말로는 스물 두살 때에도 지금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자연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 기둥에서는 사찰 건축과는 또 다른 자연미가 느껴졌다. 자연이 건축 안으로 스며든 듯, 모과나무는 흰 등굽이를 내어주며 암자의 긴 세월을 묵묵히 지탱하고 있었다. 천 개의 나무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천불보전 앞에도 요사채 기둥으로 사용된 것과 비슷한 수령의 모과나무가 살아 있는데 매우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남편이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 모과가 떨어지면 그 모과를 한 아름 주워 방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손님이 찾아오자 주지 스님이 그 모과를 잠깐 빌려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 웃었다.
구층암에는 모과나무 기둥과 함께 유명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죽로 야생차다. 이곳에 상주하고 계신 덕제 스님이 20년 전부터 화엄사 일대의 야생차를 연구하며 전통 제다 방식으로 직접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야외 차실에서 누구나 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하여 들어가 보았다. 프랑스인 젊은이가 상주하며 봉사를 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깔끔한 맛의 우롱차와 청차를 마시며 두 명의 젊은 봉사자들과 차담을 나눴다. 남편이 구층암에 머물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자 젊은 봉사자들도 흥미롭게 들었다.
처음 이곳에 왔던 날, 계곡 물소리가 너무 커서 스님 말씀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요.
시간이 흐르며 적응이 되자 원하는 대로 물소리와 사람 소리를 구분해 들을 수 있게 되었어요.
나중에는 날마다 계곡 바위에 앉아 하루 한 페이지씩 <우파니샤드>를 읽었답니다. 내 인생책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그 책일거에요 ….
다실(茶室)을 나와 그 옛날 남편이 앉아 있었을 법한 요사채 툇마루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내려왔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이었지만 그날 나는 스물 두 살 청년 남편을 만나고 온 듯한 기분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