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땀 흘린 하루 끝에 차려진 봄날의 저녁 밥상
요즘 우리 부부는 딱히 외출한 일이 없으면 오전을 읍내 헬스장에서 보낸다. 한 시간은 각자 여유 있게 스트레칭과 러닝으로 몸을 풀고, 이어 한 시간은 강사의 지도에 따라 파워 스트레칭을 한다. 60가지 동작으로 구성된 고강도 프로그램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평소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하나씩 깨워낸다. 단순히 몸을 늘리고 펴는 수준을 넘어 호흡과 함께 근력을 끌어내는 동작이 반복된다. 시작한 지 10분도 채 안되어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른다.
꾸준히 운동해 온 남편과 달리, 나는 동작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거의 사투에 가까운 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팔다리는 후들거리고 온몸이 뻐근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해냈다는 뿌듯함과 땀 흘리고 난 후의 희열로 마음이 가뿐하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엔 쉬고 싶어졌다. 하지만 잦은 봄나들이로 미뤄두었던 정원 일이 마음에 걸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슬슬 근육통이 오는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나섰다.
오뉴월이면 데크 앞을 붉은 꽃으로 장식해 주던 들장미가 어느 해부터 잎이 쉬이 떨어지면서 관리가 쉽지 않았다. 아쉽지만 들장미를 모두 베어내고, 제멋대로 뻗은 소나무 가지도 함께 정리하기로 했다. 정원 일은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뉜다. 꽃밭 담당인 내가 전체를 살피며 전지 할 나무와 가지를 정하면, 도구 담당 '기사'인 남편이 능숙하게 가지를 친다. 그 사이 나는 작업 상태를 살피며 자른 가지를 부지런히 치운다. '따로 또 같이', 부부의 찰떡 호흡이 필요한 시간이다.
미적거리던 일도 막상 시작하니 금세 속도가 붙었다. 하나를 정리하면 또 다른 손 볼 곳이 눈에 들어왔다. 장미, 소나무, 해당화, 그리고 씨앗이 떨어져 제멋대로 자란 때죽나무와 버드나무들까지.
오랜만에 전지 작업을 하고났더니, 어느새 옷은 땀으로 젖고, 손가락은 가시에 찔렸는지 따끔거린다. 흘린 땀만큼 마당이 환해졌다. 땀은 정직하다.
잘라낸 소나무 가지를 치우려고 한 아름 안으니, 짙은 솔향이 코끝을 스쳤다. 푸릇한 솔잎을 그냥 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때, 전날 사다 둔 오리 훈제가 번뜩 떠올랐다.
"오호홍, 땀 흘린 날 저녁엔 솔잎 오리 훈제찜에 막걸리가 딱이지."
마당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찜솥에 솔잎 가지를 수북이 깐 뒤 오리 훈제를 올리고 가스 불을 켰다. 그 사이 텃밭으로 냉큼 달려가 쌈으로 먹기 좋은 머위 잎과 '인삼보다 좋다'는 봄 부추를 한 움큼 베어왔다. 손 하나 까딱 하지 않아도 봄이면 저절로 쑤욱 쑥 올라오는 머위와 부추는 태평 농법을 고수하는 우리 부부에게 최고의 식재료다. 머위는 살짝 쪄내고, 부추는 친정 엄마표 레시피대로 양파를 섞어 후추와 맛소금, 참기름, 통깨만으로 간단히 무쳤다.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끝났다.
잠시 후 차려진 식탁은 땀 흘린 뒤 먹기 딱 좋은 초 간단 봄철 저녁 밥상이다.
쌉싸름한 머위 잎 위에 오리 고기와 부추 무침을 올리고 쌈장을 살짝 얹어 한입 가득 넣는다. 솔 향이 은은하게 밴 오리 고기는 담백했고, 갓 딴 머위 잎은 쌉싸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봄 부추는 입안 가득 향긋한 기운을 더했다. 여기에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니 하루의 피로가 부드럽게 풀린다.
땀 흘린 뒤 맛보는 이 한입은 어떤 산해진미와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맛',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맛이다.
땀은 정직하다. 흘린 땀만큼 삶을 여물게 한다.
봄은 다정하다. 땀 흘린 하루 끝에 가장 맛있는 한 끼를 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