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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Aug 06. 2020

그 날이후 세상이 달라졌다.

그 날은 두 번째 검진일이었다. "오늘은 심장소리를 들어볼까요?"라며 웃으며 말하던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이내 굳어졌다. “아기집은 보이는데... 아기가 안 보여요... 유산이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멍해지며 주변의 소리가 줄어들었다. 진료실의 풍경이 아득하게 느껴지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상황 파악을 정확히 해야 했기에 애써 정신을 차렸다. "아기집도 며칠 늦게 보였는데 아기도 늦게 보이는 게 아닐까요?"라는 나의 물음에 선생님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보자며 우리를 돌려보냈다.


첫 번째 검진 때 아기집을 확인하고는 “축하드려요. 2주 후에 심장소리 들으러 오세요"라고 말하던 선생님의 환한 얼굴을 보고 비로소 안심을 했었다. 임신을 하기까지 나름의 노력을 했기에 드디어 아기가 생겼다는 걸 인정받는 순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원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긴 건 아니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에게 아기가 생겼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다른 인생을 살 게 될 거라는 기대에 설레고 기뻤다. 인공수정 1차에 임신에 성공했다고 하니 주변에서 "인공 1차는 로또 당첨이래"라며 마치 내가 엄청난 일을 해낸 것처럼 추켜세워주었다. 맞벌이라 정확한 배란일을 맞추기 어려웠고 인공수정은 어쩌면 바쁜 우리에게 딱 맞는 임신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유산하지 않았더라면 8월이 출산예정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문득 생각이 난다. 만약 유산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땠을까... 새로운 가족을 만나는 것에 들떠있었을까... 나는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었을까...


결혼하고 첫 해는 남편과 일상을 함께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며 둘이 쌓아가는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다. 남편은 지금의 행복이 아기가 생겨 깨지는 것이 싫다고 말했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주말이 되면 우리의 일상이 너무 행복해서 가끔은 이렇게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일상은 너무나 평화로웠지만 회사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결혼한 그 해, 회사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외국계 한국지사에서 근무했었는데 다른 직원들은 한국지사 소속인 반면 나만 홀로 본사에 소속되어 있었다. 직속 매니저는 이스라엘에 있었고 한국지사에서는 혼자 독립적으로 일하는 환경이었다. 그래도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보려 노력은 했지만 다르다는 이유로 가까워지기 어려웠다.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욱 미움을 샀던 것 같다.


그 해 나는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에 괴로웠고 회사를 떠나고 싶었다. 미친 듯이 이력서를 넣었고 하루라도 빨리 이직을 하려고 했었다. 면접 제의를 받은 여러 회사 중에 한 곳에 면접을 보러 갔었는데 의외의 자리에서 자녀계획을 세우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시 인터뷰어는 40대 영업 본부장이었는데 결혼한 지 6개월 정도 된 내게 자녀 계획을 물었다. 우리 부부가 딩크는 아니었으므로 아이가 생긴다면 낳을 생각이라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유진 씨랑 같이 일하고 싶은데 만약에 입사하고 얼마 안 지나 아이를 가지면 내 입장에서는 정말 곤란해져요. 출산휴가는 당연히 보장하겠지만 아이가 생긴다는 건 변수가 굉장히 많은 일이라... 다시 안 돌아올 수도 있는 거고...."


그분의 말이 불쾌하게 들리진 않았다. 내가 반대 입장이었더라도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회사는 변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임신으로 공백이 생길 가능성이 아주 많은 기혼인 후보자이고 채용을 주저할 여지는 그걸로 충분했다. 직무나 커리어에 대한 인터뷰는 초반부 잠깐 나눴을 뿐 그 후 1시간 내내 '곧 아기를 가질 수도 있는 기혼 여성'에 대한 토론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앞으로 회사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어필을 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현실이 서글퍼졌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그날의 대화를 통해 아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 이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빨리 애를 낳고 1년 뒤에 다시 이직을 고려해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연하게도 인터뷰했던 회사에서 연락은 오지 않았고 나도 이직할 생각을 접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무척 쓸쓸하고 서러웠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정리된 생각을 말했다.


“아직 낳지도 않은 애 때문에 커리어에 제약이 생긴다는 게 말이 돼? 이 회사에서 허송세월만 보내느니 그냥 빨리 낳고 키워서 애기 어린이집 갈 때쯤 되면 이직할 거야"


남편은 왜 아기 낳는 일을 수단으로 삼냐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끝내 내 뜻에 따라주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임신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때 나는 가능한 한 빨리 회사를 벗어나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임신을 하고 싶었다. 남편의 말처럼 커리어를 이어갈 수단으로 생각했고 빨리 상황을 반전시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몇 달이 지나도 아기가 생기지 않았고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답답해졌다. 급한 성미에 바로 난임 병원으로 향했다. 어떤 일이든 마음먹으면 바로 처리해야 하는 성격이 이번에도 발동했다. 남편은 그다지 원하지 않았지만 내 주도하에 임신 계획을 실행해나갔다. 처음에는 기본적인 난임 검사를 받았다. 둘 다 정상이라는 소견을 들었고 노력하면 금방 자연스럽게 아기가 생길 거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그 후로도 몇 달 동안 아기는 생기지 않았고 우리 부부에게는 '자연스럽게'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처음 난임 병원을 다녀온 지 1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고 우리는 결국 인공수정을 하기로 결정했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일 때문에 저녁 약속이 많았고 평일에는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서 배란일을 맞춘다고 나름 노력을 했는데 매번 임신에 실패해 실망하기를 여러 달이 지났다. 인공수정을 하게 되면 정확한 배란일에 맞춰 시도라도 해볼 수 있으니 착상이 안 되는 건지, 수정이 안 되는 건지 이유라도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인공수정이든, 시험관이든 절대 안 하겠다며 자연스럽게 생기면 낳자던 남편도 1년이 지나니 조금 지쳤던 것 같다. 인공수정 시술은 오히려 남편이 먼저 하자고 말을 꺼냈으니 말이다.


작년 11월, 우리는 인공수정 시술을 했다. 그리고 2주 후 그토록 바라던 임신을 확인했다. 아기가 생겨 기쁜 것도 잠시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출산휴가를 가게 되면 그 사이 일이 꼬이지 않을까?' ‘출산휴가 가기 전에 큰 건은 다 마무리해야겠다'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기 이전에 커리어에 대한 걱정을 먼저 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고 그토록 걱정하던 일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하던 업무는 1년 중 연말과 연초에 가장 바쁘다. 대부분의 계약 갱신 건들 이 12월과 1월에 몰려있었고 조심해야 할 임신 초기에 새벽까지 견적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가끔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바빴는데 마감이 다가올 즈음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팠고 배고플 때마다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대부분의 회사가 종무식만 하고 일찍 퇴근하는 12월의 마지막 날에도 나는 재택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은 친정 식구들과 연말을 같이 보내기로 해 엄마와 동생이 집에 와 있었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꽃게탕을 끓여놓고 다 같이 식사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먼저 먹으라고 말하곤 방으로 들어가 마감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있었다. 보통 마감 때만 되면 날카로워지는데 특히나 작년 연말은 큰 건이 해결되지 않아 마감날까지 애를 먹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발주를 주기로 한 파트너 담당자에게 언성이 높아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생은 "누나 임신했는데 그렇게 화내면 아기한테 안 좋을 거 같은데..."라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동생의 말에 뜨끔했지만 그렇다고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새해가 되고 이틀 후 심장소리를 들으러 간 검진에서 유산이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진료실을 나오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바뀌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료대기실에 앉아있는 임산부들을 보니 어서 빨리 병원을 벗어나고 싶었다. 정신없이 병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울음이 터졌다. 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는데 바깥세상은 여전히 똑같았다. 애써 눈물을 참으며 발렛기사님이 차를 빼주기를 기다려야 했고 집까지는 30분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집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천천히 흘렀고 그때가 제일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남편은 비교적 담담해 보였는데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마자 남편이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울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겪은 일이라는 것이 나름의 위안을 주었다. 주말 동안 가끔 울다가 잠시 현실을 잊기 위해 영화를 보기도 하고 우리와 같은 사례가 있는지 인터넷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 즈음, 우리는 상황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며칠 전부터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마 그즈음 아기가 성장을 멈춘 것 같았다. 남편은 검진 때 선생님이 보여준 초음파의 아기집이 이상해 보였다며 유산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유산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도 월요일 아침 일찍 병원에 가지는 못했다. 새해 첫 번째 월요일에는 전년도 실적 리뷰와 금년도 플랜 발표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미 일은 뒷전이었지만 그래도 출근은 해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 팀원에 대한 인사 문제가 있었는데 그 일로 사장님과 꽤 오랜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며 시달려야 했다. 그때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어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내게 힘들고 아픈 일이 생겼지만 회사에서 티를 낼 수도 없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된다는 것이 지치고 힘들게 느껴졌다.


회사 일을 어느 정도 처리하고 급히 병원에 갔다. 우리에게 기적은 없었고 유산이라는 확진을 들었다.

“임신 초기 유산은 대부분 염색체 이상으로 애초에 건강하지 않은 수정란이 수정된 거예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굉장히 흔한 일이에요"라는 선생님의 말을 담담히 들었다. 유산이 되었다고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임신했던 흔적을 지워야 임신이 종결된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비교적 자궁에 무리가 덜하다는 약물 배출을 시도해볼 수 있는지 물었고 선생님은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약물 배출로는 자궁 찌꺼기가 다 배출되지 않았고 결국 수술을 하게 되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남편은 수술 후 회복실에 누워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제일 괴롭고 힘들었다고 한다. 두 번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내 잘못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다. 자책을 잠깐으로 끝낼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었다. 유산을 경험한 일은 남편에게도 꽤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내가 자책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우리의 지난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인데 매일 스트레스받고 술자리도 많고. 아기 낳기에는 어려운 사회야. 우리한테 문제가 있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 안 해. 근데 앞으로는 잘 생각해보자.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다시 아기를 가진다고 해도 어려울 거야. 아기를 낳는다고 해도 안 좋은 영향을 주게 될 거고. 다시 아기를 가지기 전에 둘 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라고 말하며 아이를 유산한 것을 우리의 문제로 결론지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봤고 치열하게 살았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하루를 살아내는 삶이었다. 아이를 가지는 일도 수단으로 생각할 만큼 일에 욕심이 많았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유난히도 열심히 살았다. 왜 그렇게 치열하고 욕심이 많았는지 생각해봤지만 딱히 이유가 없었다. 그냥 20대 때부터 열심히 살아와서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그 날 이후로 세상이 달라졌다. 정확히는 내가 보는 세상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 지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멈추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아주 잠깐 다녀간 우리의 아이가 나에게 멈추고 쉬어가도 된다는 걸 알려주고 떠난 것 같다. 멈추고 바라본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일도, 돈도, 목표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남편과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엄마가 되고 싶다. 남편과 나를 닮은 아이는 어떨지, 우리 아이는 어떤 아이로 크게 될지, 부모가 된 남편과 내 모습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기대되고 설렌다. 언젠가 남편과 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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