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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Apr 03. 2020

사장님, 회사 밖은 생각보다 따뜻합니다.

회사 밖이 춥다고요? 전 회사가 더 추웠습니다.


대학 졸업 후 딱히 하고 싶었던 일이 없었던 나는 돈을 많이 주는 곳에 가겠다고 다짐했었다. 20대의 나의 가치관은 무조건 돈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2천만 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을 떠안아야 했고 월세 내고 생활비까지 쓰려면 생활이 늘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은 돈을 많이 주는 곳 그리고 빨리 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 지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 고민할 여유가 나에겐 없었다. 가치관이 돈에 맞춰져있다 보니 이직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돈을 더 많이 주는 곳으로 계속 옮겨갔다.


마지막 회사에 이직하기 전에 외국계 회사의 계약직을 몇 군데 거치며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전 회사는 정규직이었지만 회사가 불안정해 결국 재정난으로 파산을 했다. 당시에는 모든 불행이 나에게만 닥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불행을 쫒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매사의 모든 일을 성급하게 결정했었고 성급한 결정의 끝은 항상 좋지 않았다.


나는 파산 직전에 회사를 나왔지만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는 연애 초반이었고 남편에게 구구절절한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번지르르한 말을 둘러대며 회사가 힘들어서 이직을 하겠다고 했다. 대리급이었던 나는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퇴사 무렵에 3곳의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3곳의 회사 모두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중 돈을 많이 주는 곳으로 이직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행복 주의자’라고 말한다. 남편은 연애 때부터 행복하냐는 질문을 많이 했었는데 연애 때는 이렇게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 팔자 좋게 행복 타령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행복한 지 물을 때마다 '저 사람은 뭐가 저렇게 행복하지? 나는 사는 게 힘들어 죽겠는데..'라고 생각했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사치라고 느끼던 때가 있었다.


남편에게 3곳의 회사에서 오퍼를 받아 그중 한 곳으로 이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속사정을 몰랐던 남편은 "회사가 힘들어서 그만두는 거 아니야? 돈은 적게 벌더라도 네가 행복한 일을 했으면 좋겠어. 꼭 오퍼 한 3곳의 회사가 아니더라도 말이야”라고 말했다. 어느 회사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한 달 벌어먹고사는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직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잠시 쉬어갈 여유는 없었다.


남편은 그저 내가 안타까워 보여서 쉬어가라고 해준 말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기대보고 싶었고 그냥 한 번 쉬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모든 오퍼를 거절했고 3개월의 백수생활이 이어졌다. 다행히 회사에서 권고사직으로 처리해줘서 3개월 동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최소한의 생활만 유지하며 영어공부에 몰두했고 그 결과 3개월 후 연봉을 30%나 올려 이직에 성공했다. 이직할 당시에도 나는 돈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라 두 곳의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았는데 돈을 많이 주는 곳을 선택했었다.


나는 한국에 진출한 지 10년이 넘은 안정적인 외국계 회사의 정규직이 되었다. 외국계는 보통 경력직을 채용하기 때문에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인데 입사 당시에 나는 과장으로 입사했지만 회사에서 제일 어린 직원이었다. 어린 여직원은 일 시키기 딱 좋은 먹잇감이다. 입사하자마자 서류 발행, PO 진행, 오피스 물품 주문과 같은 자잘한 업무까지 다 나에게 넘어왔다. 그리고 사장님은 본인의 개인적인 업무까지 맡아주길 바랬다. 나는 본사 다이렉트 보고였기 때문에 본사에 따로 보고해야 할 업무까지 더 하면 퇴근 후에도 일하고 주말까지 일을 해야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일이 많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사장님께 일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김 과장, 밖이 얼마나 추운 지 알아? 지금 그 자리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밖에 한 트럭 깔렸어”라고 말하고는 지시한 일을 하지 않으면 fire 하겠다고 했다. 일을 조정해달라고 얘기하려고 했지만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1년 차부터 영업실적이 좋았고 실적이 좋아지니 사장님도 눈치껏 업무를 조금씩 줄여줬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나는 퇴사를 했다. 사장님이 회사 밖이 춥다고 했을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취업을 못해서 어디라도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적어도 더 이상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회사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어려웠고 그로 인해 마음을 다쳤다.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그다지 행복한 삶은 아니었다. 지금은 먹고 살 걱정이 없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맞는 말이다. 만약 내가 아직도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삶이었다면 절대 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배부른 소리 좀 하고 싶다.


사장님, 회사 밖은 생각보다 따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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