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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Jan 03. 2022

내가 비밀 하나 말해줄까?

첫사랑을 만난다면(36_소설)

“내가 노래 한 곡 할게.” 술기운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유현이가 일어서자, 다른 약학과 동기들이 또 시작이라며 손사래를 저었다.


“쟤 말려. 철학과분들 다 들어가시겠다.”

“왜요, 궁금한데! 들어봐요, 우리!” 민주가 재밌다며 손뼉을 쳤다.     



유현이는 성민이의 만류에도 소주병에 숟가락을 넣은 후, 성시경의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가 딱 두 소절을 불렀을 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배를 잡고 웃었다. 나 역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음치였다. 그것도 정말 심각한 음치.

박자 무시, 음정 무시, 맞는 것은 가사뿐이었다.     



모두가 웃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노래를 이어갔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노래에 심취한 그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그런 그를 보니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1절이 끝나고 전주가 흐를 때, 눈을 뜨고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자 노랫소리와 친구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유현이의 두 눈만 보였다.


몇 초쯤 흘렀을까. 성민이가 이제 그만하라며 유현이에게서 숟가락을 빼앗았을 때야, 주변 소리가 들렸다. 잠시 동안 다른 세상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 얘들아 위에 좀 봐. 별 정말 많아.” 혜지가 위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와, 라는 감탄사만 내뱉을 뿐, 말없이 반짝이는 별을 감상했다. 황홀하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벌써 2시네. 이제 자러 가자.” 약학과 학생의 말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러 들어갔다. 유현이는 해먹에 누운 채 하늘을 응시했다.



“유현아, 여기 누워있다가 잠들면 안 돼. 얼른 들어가자.” 성민이가 말했다.

“아냐. 별이 너무 예뻐서 조금 더 보고 싶어.”

“으이고, 누가 말려. 얼른 들어와라, 먼저 들어간다.”  


   

조금 걱정됐지만 다 같이 숙소로 들어가는 분위기라 나도 함께 들어왔다. 누워서 동기들이랑 이야기를 좀 나누다 보니 어느새 새근새근 숨소리만 들렸다.






혹시 몰라 이불을 들고 마당으로 나가니, 유현이는 여전히 해먹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유현아, 아직 여기 있었네?” 내가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응. 별이 너무 예뻐서. 별을 보면 모든 걱정을 다 내려놓게 돼. 내가 너무 작은 존재인데 분수에 안 맞게 걱정을 많이 하나 싶기도 하고. 난 별 조금만 더 보다가 들어가서 잘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서 자.”


“아냐, 나도 잠이 안 와서.” 유현이 건너편에 있는 해먹에 앉으며 말했다.     



“여름아,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말인데, 내가 비밀 하나 말해줄까?” 그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비밀? 뭔데?”


“나 사실 외계인이야. 초능력이 있어.” 그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뭐?”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는 장난이 아니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 공중부양 보여줘.”

“그건 못 해. 하루에 한 번씩만 할 수 있는데, 아까 별 본다고 능력을 썼어.”


“그래? 그럼 순간이동은?”

“할 수 있지. 눈 감아 봐.” 눈을 감자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을 뜨자 그는 해먹을 묶은 나무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대단한데. 다른 능력도 있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응. 마음을 읽는 초능력.”

“그래? 그럼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데?”



“말해도 되겠어? 내가 말하면 네가 부끄러워질 것 같은데?” 그러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뭐라는 거야.”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냥 던져본 말이겠지만, 사실이었다. 난 그와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와 이런저런 말장난을 치다 순간 짧은 정적이 흘렀다. 조금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 중일까.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하늘에 뜬 별을 응시했다.     





그때 그가 해먹에 걸터앉으며 엄지 손가락과 새끼손가락만 펴서 전화기 모양을 만든 채 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띠링띠링 -”     

“뭐야?” 그가 갑자기 뭘 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띠링띠링 - 왜 전화 안 받아.”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어? 여보세요? 이렇게?” 당황스러웠지만 유현이처럼 손으로 전화 모양을 만들어 귀에 가져다 댔다.      


“성민아, 나 너무 힘들어.”


“성민이? 유현아, 너 뭐 하는 거야? 혹시 아직도 취했어?”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기가 할 말을 이어갔다.     




“정말 너무 힘들어. 별을 보면 난 참 보잘것없는 존재인데,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 뭐 때문에 힘이 드는데?” 힘들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나, 남자 친구 있는 애를 좋아하게 됐거든.”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란 말인가. 유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날 밀어낸 건지도 모르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 1년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긴, 모두에게 주어지는 1년인데 누구나 후회 없이 살 수는 없는 거겠지.     


“… 그랬구나. 힘들겠네.”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누르며 한 글자씩 힘내어 뱉었다.



“응. 남자 친구 있다는 것도 아는데 그 사람에게 자꾸 눈길이 가. 같이 걸을 때, 손등이 부딪치면 그 손을 꽉 잡고 싶어. 그 사람이 웃을 때면… 으스러지게 꽉 껴안고 싶어.”     



“그 사람은 네 마음을 알아?”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물었다. 그래, 그는 21살이고 나는 33살이 아닌가. 그의 마음을 다독여 줄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지, 아이처럼 내 맘대로 안된다고 투정만 부릴 순 없는 일이었다.      



“아니, 모를 걸.”

“왜?”

“멀어질까 봐 두려워서 말 못 했거든. 마음을 숨기는 게 힘들긴 하지만, 끝내는 건 더 두려운 거야.”     



“그 사람도 너한테 마음이 있을 수도 있잖아. 한 번뿐인 인생, 계속 눈치만 볼 순 없지.”

“설령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더라도 나를 선택하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너를 좋아해도 선택하지 않는다니. 대체 그런 사람이 왜 좋은데?”

화가 났다. 내가 이토록 바라는 유현이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남자 친구도 있는 사람이라니.


유현이 너는 지난 생에서도 그렇더니, 왜 이번 생까지 힘들게 사니. 그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보다 유현이가 이번 생에서도 마음 아파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유현이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인데, 그러지 못한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그냥 좋아, 그냥. 첫눈에 반했어.” 지난 생에서 유현이가 내게 고백했을 때 했던 말이었다. 나한테만 하는 말은 아니었구나 싶어 마음이 허했다.



“어디서 처음 만났는데?”

“일하는 곳에서.”     


“일하는 곳이면 우리 카페? 손님이었어? 아님 진아 언니?”

“성민아, 너 진아 누나 알아? 게다가 언니는 또 뭐야.”


     

아 맞아, 나는 지금 성민이지. 우리 카페에 있는 사람이란 말에 너무 흥분하고 말았다. 그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앞에 있는 나도 못 알아볼 정도라니. 처음엔 그냥 장난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 보였다. 그 친구들이 말한 술주정이 노래가 아니라 이런 것이었나.     



“아, 진아 누나. 네가 지난번에 말해줬잖아. 일할 때 많이 도와준다고.” 내 말에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랬나? 근데 그 누나 말고. 내가 영훈이 소개로 카페에 면접 보러 간 날 만났어.

전역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거든.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카운터에서 누가 엄청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거야.



그 사람은 내가 손님인 줄 알았겠지? 카운터에서 서성거리면서 서있으니까 ‘뭐 주문하시겠어요?’ 하고 웃으며 묻더라고.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어. 내가 면접 보러 왔다고 하니까 사장님 잠시 자리 비우셨다고 커피 한잔 마시면서 기다리라고 하더라고. 같이 일하게 되면 좋겠다면서.



난 카페인 마시면 잠을 못 자거든. 그날 밤에 잠이 안 와서 누워있는데 계속 그 사람 얼굴이 떠오르더라고. 다행히 면접 붙어서 일하는데 아르바이트하는 요일이 달라서 늘 못 만났어. 그러다가 한 달쯤 뒤에 여기 답사 오면서 만났어. 정말 온 세상이 분홍색으로 보인다는 말이 무슨 말인 줄 알겠더라. 눈물 날 뻔했지 뭐야.”          




그의 말을 듣는 시시각각 내 표정이 변했다.


그래서 지금, 내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지?


근데 왜 나를 밀어낸 거지?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술 취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데, 더이상 만나지 못할까봐 겁이 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같은 마음이었던 건가. 우리는 서로 힘들어했던 건가.          



좋아한다고 말해야 했는데, 너무 놀라고 기뻐서 말 대신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나를 지그시 보더니 그가 말했다.         




“백여름, 너 왜 그러는데. 왜 남자 친구 있으면서 나한테 잘해주는데. 애써 붙잡고 있는 마음 흔들리게, 너 정말 나쁘다.” 


그는 마음이 후련한 듯, 하지만 괜히 말했나 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몇 초쯤 흘렀을까. 머리를 푹 숙인 그에게 다가갔다.


“아냐, 나 남자 친구 없어. 나도 유현이 너 좋아해. 그것도 아주 많이.”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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