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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Nov 22. 2023

놀이터에서 배운 것들

정근이를 처음 만난 건, 늦은 밤 놀이터였다.


고1이었던 난 어두운 벤치에서 친구들과 소주와 새우깡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동네 할머니의 불호령이 들렸다. “이거 빨리 원상태로 안 해놔.” 아까부터 남자애들이 힘자랑을 한다고, 놀이기구 철근을 뽑아놓은 게 화근이었다. 사과할 거란 기대와 달리 웬 키 작은 남자가 할머니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네가 뭔데 상관이야.” 친구들이 말려도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할머니한테 화를 냈다. 내 비록 구석에서 소주를 까먹는 청소년이지만, 불의를 보고 지나칠 수 없기에 숟가락을 얹었다. “할머니한테 버릇없이 뭐 하시는 거예요?”

나의 출현에 그는 더 미친 듯이 날 뛰었다. “여자라고 못 때릴 줄 알아!” 나는 잔뜩 졸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익숙한 듯 말려주어 할머니와 그곳을 빠져나왔다. 좁은 동네라 후환이 두려웠지만, 착한 딸내미들이라는 할머니의 넉넉한 칭찬에 뿌듯한 밤이었다. 그날의 예의도 모르고 할머니한테 덤비고, 여자도 때린다고 소리 지른 놈이 정근이었다. 키가 165센티 정도로 보이고, 힙합바지를 입은 스무 살 대학생. 알고 보니 동네에서 유명한 양아치였다.

나는 ”여자도 때린다 “는 정근이라면 몸서리치게 싫다며 피해 다녔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먹다 우연히 합석을 했다. (다행히 그는 날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대반전은, 이날 잔뜩 술에 취한 내가 “오빠들 좋아요 “를 수십 번 외쳤고 꽐라가 되어 정근이 옷에 토했다. 다음날 아침 정근이한테 전화가 왔다. ”집 앞이니까 나와. “ 나가니 오래된 프라이드 자동차에 친구 둘을 태우고 온 정근이가 보였다. ”타.“ 어제 한 행동이 미안해 순순히 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경기 외곽의 전문대학교였다. 군대 갈 예정이라 휴학계를 내러 왔다고 했다. 휴학계를 내는데, 대체 왜 친구 둘과 어제 처음 만난 나까지 대동한 걸까. 그는 정말 허세에 쩔은 놈이었다.


정근은 군대 가기 전 한 달 동안 매일 술을 마셨다. 덕분에 난 원 없이 생맥주를 마셨다. 하루는 밤길을 걷는데 그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저 새끼가 뭘 야려.” 네? 이 컴컴한 밤에 뭐가 보여요? ”저기 10층에서 저 새끼가 째려보잖아.“ 말도 끝나기 전에 냅다 계단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봐도 사람 형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그를 어떻게 끌고 내려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에 비해 나는 야간자율학습을 한 뒤 술을 마시는 모범생이었다. 반장에다가 반에서 1~2등을 하는 우등생. 양아치 정근과 나는 애초에 교집합이 없었다. 그나마 술 정도? 궁금했다. 나는 술을 얻어 마실 수 있어 그를 만나러 나갔는데, 그는 왜 나를 부르는 걸까? 한 번은 내가 술을 꺾어 마셔 친구들의 원성을 사자 정근이 나서 “가끔은 꺾어 마시는 것도 맛”이라고 편을 들어줬다. 매일 불러 술을 사주는 것도, 휴학계를 내러 가는 길에 불러낸 것도 모두 고백의 전조인 걸, 나는 몰랐다.

한 달 뒤 정근이 까슬하게 깎은 머리를 보여준 뒤 입대했다. 그는 종종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했고, 편지도 보냈다. 정근이 군대 가고 며칠 뒤였다. 내가 무슨 얘기 도중에 ”정근 오빠는 정말 (술 사줘서)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친한 후배였던 유정이가 말도 안 된다고 펄펄 뛰었다. 영문을 모르는 내가 빤히 쳐다보자 유정은 말했다. ”언니가 우리 맡긴 날, 정근이가 희은이 건드린 거 정말 몰라?” 유정과 희은은 내 친한 후배였다. 그 애들이 가출한 후, 우리 집에서 재워줬다. 참다못한 엄마가 한 달 만에 말했다. “쟤들 당장 집에 보내.” 그때 생각난 게 정근이었다. 처음에 난 걔들을 차(휴학계 내러 갈 때 탔던 프라이드)에서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정근이 부모님과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근은 걔들을 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그날밤 유정이 살쪘다며 살살 놀려 화가 나게 해 집을 나가게 했다. 내게도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유정이 사라졌다는 희은의 연락을 받고 밤새 그 애를 찾아 수소문했으니까. 그런데 같은 시간, 정근이 희은을 ‘건드렸’다니.

유정은 분노를 꾹꾹 담아 내게 말했다. 그날 정근이가 자신을 쫓아낸 이유가 희은이랑 자기 위해서였다고.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희은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집에는 정근의 부모님이 계셨다. 그런데 정근은 희은을 ‘건드렸’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유정을 쫓아내면서까지. 희은을 만나 묻고 싶었지만, 다른 동네로 뜬 후였다. 그렇게 백일이 지나고, 정근이 휴가를 나왔다. “나 휴가 나왔다.” 수화기 너머 정근의 들뜬 목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서른여덟의 난 성폭력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렸겠지만, 열일곱의 난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합의된 일이었다면, 유정이 그렇게 말할 리 없었지 않을까. 유정은 희은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했다. (나는 차마 더 묻진 못했다.) 그날밤 난 왜 정근에게 그 애들을 맡긴 걸까. 후회와 죄책감, 정근에 대한 원망, 혹시 유정이 잘못 아는 게 아닐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이 뒤범벅되어 그 사건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거나 해석하기 어려웠다.


정근을 만나러 간 술자리에서 그는 내게 학알 천 마리가 든 유리병을 안겼다. “너 주려고 접었어.” 박정근과 학알 천 마리라니. 정근은 단단히 준비한 듯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더니 “좋아한다”라고 고백했다. 이윽고 그가 내게 “좋아한다고 “ 확인하듯 한 번 더 말했을 때, 눈물이 쏟아졌다. "희은이한테 왜 그랬어요?"

​​

이틀 뒤, 정근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말했다."희은이랑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사실이었구나. 절망스러웠다. 그는 희은이 같은 애를 네가 몰라서 그런다며, 그런 애들은 닳고 닳은 "걸레"라고 말했다. 자기는 그 애의 유혹에 넘어가 실수했다고. 그 애는 "시궁창"이니 당장 빠져나오라고 조언도 했다. 왜 난 질문을 해서 그에게 변명할 기회를 준 걸까. 그는 희은과 너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나를 설득했다. 이제 내가 우월감을 느낄 타이밍인가? 희은과 달리 나는 ‘섹스를 함부로 하지’ 않으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던지고 나왔다. "나한테 시궁창은 오빠예요."

그 뒤로도 휴가 때마다 그는 전화를 했다. 나는 가끔 나가 술을 마셨다. 하루는 만취한 정근이 희은이를 불러오라며 난동을 부렸다. 섹스를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 장면을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거기 왜 나간 걸까. 친구들이 있어서? 술을 마실 수 있어서? 정근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남아서? 모르겠다. 정근과는 내가 고3이 되며 서서히 멀어졌다. 그 사이 정근은 내가 하지도 않는 목걸이를 사 오고, 종이학 천 마리를 접어오기도 했다. 내가 원한 건 그런 선물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과였다. 그날, 유정이를 밤늦게 쫓아내서 미안하다고, 열다섯 유정이 늦은 밤거리에서 겪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해 너무 무심했다고. 희은이가 어떤 사람이었든, 희은에게 한 내 행동은 잘못이라고. 희은에게 가서 사과하겠다고. 그는 미안해하지 않았지만, 나는 오래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날 정근에게 희은을 부탁한 게 나라서.

스무 살이 된 후, 동네 커피숍에서 우연히 그를 봤다. 낮술을 마시며 여자들과 놀고 있었다. 영영 동네를 떠난 희은이 생각이 나 속이 쓰렸다. 그동안 희은을 찾아가 서너 번 만났지만, 정근에 대해서 묻지 못했다. 대신 희은이가 술을 마실 때마다 정근이가 보고 싶다며 울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잠든 희은의 얼굴을 봤다. 하얗고 통통한 볼. 늘 싱글벙글 웃으며 내 팔에 무언가 낙서하길 좋아하던 아이. 엄마가 집을 나간 후로 집에서 자는 게 죽기보다 싫어 가출을 밥 먹듯이 하던 아이. ​


가장 힘든 순간은 정근의 말과 희은의 행동이 오버랩되는 순간들이었다. 남자와 자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희은이 모험담처럼 섹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정근의 말이 떠오르는 게 괴로웠다. 희은한테는 그날 일이 정말 별 일이 아닌데 나 혼자 호들갑 떤 건 아닐까? 희은이 정근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는 더 혼란스러웠다. 그날의 일은 정말 희은이 원해서 일어난 일이었나. 나는 왜 희은에게 그날 일을 한 번도 묻지 못한 걸까. 내가 의심하는 것들이 사실일까 봐? 나는 정근이 심어준 의심의 씨앗을 키우는 내가 미웠다. 그럴 때마다 머리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희은이 ”시궁창“이라고 비난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신의를 저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한 건 희은이 아니었다.

희은이 정근을 좋아했든 말았든, 정근의 그날 행동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흔들림 속에서 난 지켰다. 희은은 갈 곳 없는 열다섯 살이었고, 그는 그를 재워주기로 한 스무 살 성인 남성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정근‘들’을 만났고, ‘여자’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난 그날 그 이야기를 전해준 유정의 단호함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라고 때로는 문제아들이라고 어른들은 놀이터에서 노는 우리를 보며 혀를 찼지만, 우리는 서로에게서 부단히 배웠다. 우리를 의심하고 비난하고 때로는 추켜세우는 목소리 속에서 자신과 친구를 지킬 수 있는 태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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