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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Nov 08. 2023

헤어지자는 말

2017년, 여자친구 이수와 나, 둘의 퇴사 기념으로 여행을 떠났다. 사람들은 보통 추운 겨울에 따뜻한 태국으로 떠나는데, 나와 이수는 비행기값이 가장 싼 4월에 떠났다. 4월은 한 해 중 태국이 가장 더울 때다. 도착했을 때 방콕은 37도였다. 아스팔트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왔다.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카오산로드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입고 있던 반팔티가 땀에 흠뻑 젖었고, 쏟아지는 땀 때문에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택시로 가면 1만 원인 거리였는데, 가난한 우리의 예산은 하루에 인당 4만 원이었기 때문에 무료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30분 후에 도착했는데, 이미 만원이었다. 순간 이걸 타야 하나, 1만 원 더 쓴다고 우리가 망하나 싶었지만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올라탔다.


흔들리는 버스 안,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 사이에서 나는 들고 있던 관광지도로 이수에게 부채질을 해줬다. “안 해도 돼.” 지친 듯 이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왜, 덥잖아.” 이수가 내 손목을 잡으며 더 더우니 그만하라고 말했다. 버스에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돌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도 들어오는 바람은 후끈했다. 부채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부채질을 그만두고 구글맵을 열었다. 버스에 태국어로 나오는 안내 방송으로는 도저히 목적지에서 내릴 자신이 없었다. “10분 남았대, 좀만 참아.” 이수는 더운 듯 내 말을 건성으로 듣고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마음이 상한 건. “8분 남았나 봐. 걱정하지 마 내가 보고 있을게.” 내가 다시 말한 순간이었다.


“힘드니까 말 좀 안 걸면 안 돼?” 순간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태국이었고, 버스에는 그 애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는데도, 민망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버스에서 내리고 싶었다. 내 예고대로 버스는 8분 후 정류장에 도착했고, 안내 방송에 너무도 정확하게 “카오산 로드”라고 나와 구글맵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내릴 수 있었다. 화가 난 나는 먼저 내려 앞으로 쏜살같이 걸어갔다.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지가 있던 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버려진 아이 같은 심정인지(아무도 모르는 외국에서 말을 걸지 말라니!), 네가 당장 달려와 나를 달래라는 마음이었다.


“어디 가? 같이 가” 이수가 뒤따라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나도 몰랐다. 선크림을 잔뜩 바른 얼굴엔 땀이 흘러내려 눈이 따가웠다. 바로 앞에 익숙한 빨간 간판의 버거킹이 보여 일단 들어가 콜라를 시켰다. “어떻게 이 낯선 땅에서 나한테 말을 걸지 말라고 할 수 있어?” 앉자마자 내가 화를 내자 이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또 시작이네?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화가 나면 풀릴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공격적인 말들을 다다다 쏟아부은 뒤, 상대가 나와 똑같이 화가 나 주체를 못 할 상태가 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풀렸다. 이수는 아주 못된 심보라고 말해 왔는데, 그 버릇이 태국에서 터진 것이다. 태국에 도착한 지 5시간도 안 됐다. 우리에게는 16박 17일이라는 대장정의 여행이 남아 있었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너 혼자 여행하든 말든, 알아서 해.” 이수가 꼼짝도 하지 않자 내가 초강수를 뒀다. 내 버릇 중 하나였다. 상대가 꿈쩍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해서든, 무슨 짓을 해서든, 움직이게 만드는 것. “그리고 한국 가면 우리 헤어져.” 왜 여기서 당장 헤어지자고 안 하고, 굳이 한국에 가면 헤어지자고 했을까? 그 와중에도 태국에서 갑자기 헤어져서 혼자 남으면 무서워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은 이수를 자극했다. “너, 또 시작이지? 그래, 가. 뭘 한국까지 가서 헤어져. 지금 헤어져.” 연신 입을 꾹 닫고 있던 이수가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하자 나는 이상하게 흥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이전부터 수십 번 생각했다. 상대가 아무리 달래고, 사과를 해도 화가 풀리지 않다가 나와 같은 온도로 화를 내기 시작하면 그제야 안심이 됐다. 그제야, 아 내가 이만큼 이 사람에게 중요하구나, 이렇게 얼굴 붉히며 화를 내고, 안달할 만큼 중요했구나 싶었다. 가끔 이수가 너는 내가 너만큼 화가 나야 속이 시원하지 물었을 때 나는 펄펄 뛰었다. 아니야, 내가 왜.라고 했지만 알고 있었다. 이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야 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걸. 그래서 기어코 싸울 때마다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다는 걸. 나는 왜 이러는 걸까. 나 자신을 타일러 보고 달래 봐도 이 버릇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마주 앉은 이 사람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절망하는 표정을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하는 척을 했다. 이대로 승리를 굳히고 싶었다. 이제 이수가 화를 내며 뭐 하는 거냐 핸드폰을 뺏으면 못 이기는 척 화해를 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이수가 캐리어를 끌고 가게에서 나갔다. “어디 가?”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예상 못한 전개에 나는 얼었다. 나는 영어도 못했고, 당시에는 통역 어플도 나오지 않았을 때다. 말이 없는 이수를 따라가자 숙소가 나왔다. 이수는 나를 무시한 채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나도 옆 침대에 짐을 풀고 누웠다. “한국 간다며?” 물을까 무서웠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수는 자버렸다.


그다음 날부터 어색한 여행이 이어졌다. 맛있는 걸 먹거나 수영을 하며 기분이 풀려 같이 웃기도 했고, 친구들 줄 선물을 뭘 살 거냐라든가 택시를 타냐 마냐로 다투기도 했다. 그 뒤로도 난 “헤어져”라고 말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말해 버리는 순간, 관계의 모든 짐을 벗어던진 것 같은 해방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헤어지자는 내 말에 절망하는 상대의 표정이 주는 안도감에 중독됐다. 사람들은 “싸울 때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 ‘극혐‘”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안쓰럽다. 속상해, 위로받고 싶어, 사과받고 싶어, 안아줘. 같이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말들로는 원하는 바를 성취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쓰는 극단의 언어 같아서다. 나는 여전히 상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면 “헤어져”라는 말부터 나온다. 그게 사랑을 확인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내 사랑법은,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 : 헤어져라고 하면 그냥 날 안아줘. 안아달라는 말이야.


이수 : 그냥 안아달라고 하면 안 돼? 헤어지잔 말 듣고 어떻게 안아줄 수 있겠어.


나 : 나도 안 돼. 그냥 통역한다고 생각해. 헤어져 = 안아줘라고.


이수와 나의 통역은 한 번도 성공한 일이 없었다. 결국 나의 헤어져가 통역이 필요 없는 순간 우리는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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