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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Oct 28. 2023

만두 빚는 시간

아빠는 밀가루를 사랑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곰표 밀가루를 큰 볼에 쏟고 적당히 물을 부은 뒤 반죽했다. 처음에는 너무 질어서 아빠 손에 엉겨 붙던 밀가루 반죽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뽀얀 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나는 신기하게 바라봤다. 반죽이 다 되고 나면 아빠는 반죽을 길게 민 뒤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그러면 옆에 있던 나와 동생이 홍두깨와 맥주병을 하나씩 들고 만두피를 민다. 초등학생인 우리 손에서 탄생한 만두피들의 모양은 대체로 원을 이루지 못하고 찌그러져 있지만, 아빠는 개의치 않는다. 우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빠가 만두피의 반 이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아빠와 우리가 만두피를 미는 동안, 엄마는 만두소를 준비한다. 김치를 송송 썰고, 두부를 으깬다. 때에 따라 숙주나 부추가 들어갔다. 돼지고기도 그때는 필수였다. 엄마는 만두소를 만들 때 속 재료를 모두 익혀 냈다. 우리가 만두를 만들다 한 숟가락씩 만두소를 퍼먹어서였다. 만두를 빚다 먹는 만두소는 꿀맛이었다. 자리에 앉아 만두를 빚기 시작한다. 만두피를 한 손 가득 올린 뒤 속을 넣고 반을 접는다. 마주한 만두의 가장자리를 꾹꾹 누른 후 그 끝을 이어 붙여 만두 모양을 만든다. 밀가루가 뿌려진 쟁반에 차곡차곡 만두가 쌓인다.


만두가 한 판 만들어지면 엄마는 만두를 삶기 시작한다. 파, 마늘, 고추를 종종 썰어 넣은 엄마표 양념간장에 찐만두를 찍어 먹으면 게임 끝. 동생과 내가 만든 터진 만두는 주로 아빠 차지다. 우리는 입으로 호호 불어 가면 뜨거운 만두를 먹으면서 만두를 빚는다. 만두가 끝나갈 즈음이면 아빠는 남은 밀가루 반죽을 칼로 썰어 칼국수를 만든다. 엄마는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국물을 낸다. 이날 점심인 칼만둣국이 완성된다.


칼만둣국을 해 먹는 일은 매주 행사처럼 벌어졌다. 여행을 가거나 명절이 아닌 이상 초등학교 내내 반복됐다. 남자가 요리하는 모습이 흔하지 않았던 1990년대 중반, 친구들이 아빠가 왜 요리를 하냐고 물으면, 나는 우리 아빠는 ‘취사병’ 출신이라서 그렇다고 답했다. (알고 보니 아빠는 의무병이었다. 나는 어디서 ‘취사병’ 소리를 들은 걸까.) 세월이 가며 아빠가 쓰는 도구는 여러 번 바뀌었다. 한 번은 수동으로 면을 자르는 절삭기를 가져왔다. 밀가루 반죽을 넣고 손잡이만 돌리면 면이 되어 나왔다. 그 기계는 만두피를 펴는 기능도 있었다. 기계로 반죽을 동일한 두께로 펴면 그릇으로 찍어 내는 원리였다. 하지만 늘 몇 번 쓰다 장롱 위에 처박혔다. 손맛을 따라올 수 없고, 쓸 때마다 청소하기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기계가 들어올 때마다 멀뚱히 아빠 손만 쳐다보던 나는 기계가 비닐에 쌓여 퇴장당할 때마다 활기가 돋았다. 도움이 되든 아니든, 나도 아빠, 엄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감각이 좋았고, 만두 모양이 어쨌든 우리 딸 잘 빚는다 칭찬해 주는 엄마의 말과 아무리 만두를 터트려도 한마디 않는 아빠의 침묵이 좋았다.


아빠와 나는 만두를 빚어 먹고도 일요일 저녁 마트에 가면 꼭 물만두를 사 와 야식으로 먹었다. 물에 넣고 끓여 떠오르면 꺼내는 물만두를 식초를 살짝 넣은 간장에 찍어 먹으면 한입에 녹아 없어졌다. 그때마다 아빠와 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설날에 큰집에 가면 큰어머니는 꼭 떡만둣국에 떡을 많이 넣을지 만두를 많이 넣을지 물었다. (돌아보니 엄청난 맞춤 서비스였다!) 그때마다 난 “만두만!”을 외칠 정도로 만두를 사랑했다.


스물여섯 살에 채식을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만두를 먹을 수 없다는 거였다. 2011년에는 채식 만두라는 건 팔지도 않았고,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만두에 고기가 들어간다는 인식마저 없어서, 나는 채식을 하고도 몇 번이나 만두를 먹었다. 그러다 같이 먹던 친구가 “만두에도 고기 들어가지 않아?”라고 물은 뒤 화들짝 놀라 만두를 끊게 되었다. 만약 채식하면 만두를 못 먹는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채식을 했을까? 의심할 만큼 난 만두가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 빼고 만들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에 1월 1일 날을 잡아 만두 100개를 빚었다. 두부와 호박, 표고버섯, 숙주를 넣어 만두소를 만들고, 만두피는 만들어진 것을 사 왔다. 인스턴트 만두피를 썼는데도, 100개의 만두를 빚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냉동실에 들어갈 자리를 만드는 것도 일이었다. 동생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혀를 찼다. 5시간은 족히 걸려 내 입에 들어온 채식 만두를 먹으며 눈물이 찔끔 났다. 5년 만에 먹는 만두였다.


그날은 “진작 직접 해 먹을 걸!” 땅을 쳤지만, 그 뒤로 엄두가 나지 않아 만두를 두세 번 더 하다 말았다. (매년 1월 1일에 빚었다. 그만큼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니까.) 이제는 그보다 간편하고 저렴한 대기업의 채식 만두가 많아진 탓도 있다. 가끔 아빠가 농사지은 호박을 많이 주면 아빠가 여름마다 해주던 호박 만두를 해 먹는다. 채 썬 호박을 소금에 절여 두부를 넣고 만두소를 만든다. 한 입 베어 물면 아삭한 호박의 식감과 달큰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아빠, 엄마는 이제 거의 만두를 만들지 않는데 가끔 한 번 할 때면, 나를 위한 채식 호박만두를 따로 만든다. 요즘 대기업 만두들은 피가 얇고 속이 꽉 차 있는 데 비해 부모님이 만든 만두는 피도 두껍고 속도 비어 있다. 그래야 잘 터지지 않으니까. 근데도, 그 소박한 만두가 맛있어서 아껴 먹는다. 나는 음식을 급하게 먹는 편인데, 그 만두만은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꼭꼭 씹어 먹는다.


만두 빚는 시간이 언제 멈췄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가 음주운전으로 회사에서 잘리고 컨테이너 집으로 이사 갔던 중1 때가 아닐까 추측할 뿐. 내 기억엔 초등학교 내내 주말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어른이 되어 서울에서 독립한 뒤로는 누군가와 같이 요리할 일이 없었다. 특히 만두 같은 번거로운 요리를 해 먹을 일은 더더욱.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어떻게 쫓기지 않고 오로지 만두만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었을까. 뽀얀 밀가루가 탱탱한 흰 반죽이 되어, 투명한 찐만두가 될 때까지 기다리다 한 입 베어 물면 그날 하루가 완성되었다. 하트 누를 인스타그램도, 처리할 업무도, 응답할 카톡도 없이 만두를 빚던 1995년의 토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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