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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Apr 01. 2024

영길 할아버지

“종일 답답해서…” 전화 속 노인은 말끝을 흐렸다. 그는 내가 일하는 비영리단체에서 붙인 말벗 봉사 포스터를 봤다고 했다. 지적장애 1급인 마흔네 살의 딸과 둘이 사는데 자기도 ‘눈이 멀어’ 나가지도 못하고, 종일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포스터를 붙이고 한 달 만에 처음 온 전화였다. 동료와 난 환호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먼저 만난 동료는 며칠 속앓이를 했다. 영길 할아버지가 매일 성경을 읽는데 점점 눈이 보이지 않아 그것을 점자판으로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점자판 성경은 있지 않냐고 물으니, 그가 필사한 성경이 따로 있단다. 나는 그 필사본을 타이핑해 글자를 30포인트로 키워 인쇄했다. 그걸 갖다 준 뒤 난 그에게 "대단한 분"이 되었다.


임무를 다한 난 후련했다. 근데 웬걸. 영길 할아버지는 그 뒤로 일주일에 한두 번 내게 전화했다. 통화는 늘 "놀러 와라"로 끝났다. 임대아파트에 혼자 살며 고립된 노인들을 돕겠다며 말벗 봉사를 시작했지만, 점점 혼란스러웠다. 뜨개질이나 화분 만들기 프로그램은 한 시간이면 끝났지만, 말벗 봉사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하면 할수록 말‘벗’을 봉사로 한다는 게 이상했다. 우정은 해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와 만나고 올 때마다 무슨 시간 낭비인가 싶었고, 종일 TV 말고는 할 게 없다는 그의 푸념을 듣는 일에도 점점 지쳤다. 하지만 이미 하겠다고 시작한 일이라 의무감으로 한 달에 서너 번 그의 집을 찾았다.


하루는 벨을 누르고 섰는데 옆집 아주머니가 젊은 애들이 그 집에 왜 가냐며 “냄새나서 못 살겠다”라고 인상을 썼다. 나는 똥 아닌 오줌에서 그렇게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 처음 알았다. 영길 할아버지는 종종 우리 앞에서 언니의 기저귀를 벗겼다. 오줌으로 묵직해진 기저귀를 베란다로 내던졌는데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항상 올백 머리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갑옷이었다. 오줌 냄새나는 집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웃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깔끔한지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흰 청바지를 선물했다. 그간 두유나 과자를 넙죽넙죽 받아왔지만, 이 옷은 달랐다. 가판대에서 내 사이즈를 가늠해 3만 원이나 주고 샀다는 그 옷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와 옷장 깊숙이 넣어버렸다. 그 각별한 마음이 내게는 짐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장대비가 내렸다. 운동화에 비가 들이쳐 양말까지 축축할 때 전화가 울렸다. 봄밤, 어디예요?” 나를 찾는 동료의 목소리였다. “영길 할아버지가 십 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셨대요.” 아들이 있다고?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근데 그 아들이 봄밤 사는 일산에 있다고 자기는 눈이 안 보이니 데려다 달라고 하시네요.” 왜 하필 비 내리는 날 아들을 찾은 걸까. 난 시각장애 3급이라는 영길 할아버지가 얼마나 눈이 안 보이는지 알지 못했다. 전화를 걸자 늘 그랬듯, “봄밤이냐?”라고 물었다. 그는 오늘 아니면 소용없다고, 오늘 꼭 가야 한다고 했다.


그냥 빨리 끝내자, 거절하느니 후딱 다녀오는 게 편하니까. 사정이 딱한 노인의 부탁을 거절하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돕겠다고 찾아가 놓고 이제 와 힘드니까 항복 선언하는 게 활동가로서 자존심도 상했다. 동료들이 안 가도 된다고, 모든 걸 해줄 수 없다고 말릴수록 난 이런 것까지 한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우리는 삼십 분 뒤 그의 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지하철에서 그는 아들 이야기를 했다. 10여 년 전, 카센터에서 일하던 아들이 비싼 손님 차를 훔쳐 사고를 내 큰 빚을 지고 감방에 갔다. 어릴 적부터 도벽이 있었고, 싸움을 잘해 돈이 많이 드는 망나니였다. 출옥 후 행방이 묘연하던 걸 며칠 전 동사무소에서 주소를 조회해 찾았다. 아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그쳤다. 벨을 아무리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돌아가자 해도 그는 무작정 기다리겠다고 버텼다. 근처에 카페라고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지어진 신축 빌라였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바닥에 앉아 싸 온 도시락을 깠다. 그에게 먹겠냐고 권하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우걱우걱 김치와 감자조림을 씹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메모를 남기고 떠나자는 내 말에 그가 수긍했다.


한 달 뒤 일요일이었다. 영길 할아버지한테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 와 있었다. 놀라 전화하니 다짜고짜 화를 냈다. “너는 뭐 한다고 그렇게 전화를 안 받냐? 오늘 아들 찾았다.” 어이가 없었다. 찾았으면 그만이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늘 네가 전화를 받았으면 아들하고 만났을 거 아니냐.” 그제야 그간의 사건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졌다. 그가 갑작스레 아들을 찾은 일도, 꼭 내가 동행해야 했던 것도, 그날 끝까지 아들을 기다렸던 것도 다 나와 만나게 하려는 노인네의 속셈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며느릿감으로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그제야 우리의 동상이몽이 드러났다. 나는 내가 불쌍한 노인을 돕는 활동가인 줄 알았는데, 그에게 난 망나니 아들을 내조할 예비 며느리였던 것이다. 나는 그와 벗이 되기도 어려운데, 그는 가족이 될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의 아들은 망나니 아닌가.


“이제 너랑 다신 연락하지 않으련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저도 할아버지처럼 속이는 사람은 싫어요.” 70대의 그와 20대의 내가 악을 쓰며 화내고, 유일하게 찾은 합의점은 다신 보지 말자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자 후련했다. 드디어 끝났다. 한 번도 입지 않고 가지고 있던 빳빳한 흰 청바지도, 그를 위해 만들었던 성경 파일도 이제 버릴 수 있다. 밤낮, 주말 가리지 않고 “봄밤이냐” 묻던 그의 전화도, 놀러 오라던 그의 요구에 부담을 느끼던 날들로부터 이제 해방이다. 나의 항복이 아니라, 그의 절교 선언으로 관계가 끝난 것이다.


나는 그와 관계를 끝낼 명분을 찾아 기뻤지만, 한편 그에게 관계 파탄의 책임을 모두 미뤄놓고 안도하는 것이 마음에 찔렸다. 왜 진작 솔직하게 못하겠다고 하지 못했을까. 왜 무리해서 아들 집까지 동행했을까. 왜 입지도 않을 흰 바지를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와 서랍 속에 처박았을까. 그가 나보다 불쌍해서? 내가 그보다 나은 사람이라서? 내가 할아버지를 돕는다는 만족감에 취해 있을 때, 그 역시 날 며느리로 만들 속내를 숨기고 있었으니 샘샘인가. 그와의 일을 회고할 때 내 유일한 위안은, 그도 나를 이용했다는 거다. 우리 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남은 말벗 봉사 포스터를 모두 파쇄했다.


그날 이후 그는 전화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는 모른 척 나를 지나쳤다. 그날도 흰옷을 입고, 하얀 중산모를 쓰고 있었다. 너무 하얘서 눈길이 갔다. 나도 모른 척 그를 지나쳤다. 시간이 지나고야 기억이 났다. 길에서 마주쳐도 나는 눈이 안 보여 알아볼 수 없으니, 말을 걸라던 그의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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