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은 기억이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오랫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이 계절에는 여기가 가장 살기 좋다고 했던 남편의 말대로… 캘리포니아의 여름은 덥지도 습하지도 않고, 햇빛은 한가득이지만 바람은 적당히 불어와 그늘에 앉아 커피 한잔을 하면 “이게 행복이지, 뭣이 중한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오는 마당의 꽃과 나무 향도 마음을 채운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반가운 집집의 과일나무들...
이민 후 처음 맞았던 계절은 늦가을이었다. 강제적 백수 생활을 하며 매일 걸었던 공원 산책길은 울긋불긋 고운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집집마다 주렁주렁 열리다 못해 마당과 길거리에 나뒹굴던 오렌지와 레몬들은 내게 낯설고도 놀라운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귀하디귀했던 과일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모습은 충격처럼 다가왔다.
봄아, 너는 아마도 네 유년을 떠올릴 때마다 이 집집마다 풍성히 열리던 오렌지와 레몬나무를 먼저 기억하겠지.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아니라 오렌지와 레몬이 익어가는 시절로… 나와는 너무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는 너에게, 나는 어떤 엄마로 남을 수 있을까. 네 마음에 진정한 휴식과 포근함을 주는 사람일까. 네가 든든히 디딜 토양이 되고, 마음껏 뻗어나갈 뿌리가 되는 엄마이고 싶다.
말했었지… 너를 갖던 순간부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느낌으로 알았어.
네가 내 안에 자리하고 있을 것 같아 늘 조심했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운동도 하고 일상처럼 보냈지만, 속으로는 먹지 말아야 할 것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검색하곤 했지... 너는 사과씨만 하던 순간부터 이미 너무 사랑스러웠단다. 존재만으로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너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어.
가끔은 그때가 그립기도 해.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너’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나를 아끼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비록 힘들어 너에게 고함을 치거나 화를 낸 날이었더라도, 매일 밤 너와 나란히 누워서는 늘 무탈한 하루에 감사했다는 것...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좋은 기억과 긍정적 감정은 순간의 위안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넓히고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고(브로드 앤 빌드 이론). 그래서 작은 행복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일수록 어려움 앞에서도 더 쉽게 다시 일어선다고 한다. 또 연구에 따르면, 과거의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는 행위 자체가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회복력을 키워준다. 결국 우리가 힘들 때 지난 행복한 순간을 불러내는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포브스에 실린 하버드 성인발달연구(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 기사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80년 동안 사람들의 삶을 추적한 이 연구에 따르면, 긴 삶 속에서 건강과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좋은 관계였다.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 노인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힘이 되고, 아이에게는 좌절을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력과 근력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오늘은 저녁 먹고 동네 산책을 하자.
나는 걷고, 너는 킥보드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꽃향기도 맡고 돌맹이도 주워보자.
그러다 성인이 된 네가 이 동네 길을 혼자 걷게 되면, 그 풍경이 네 어린 시절을 불러내며 네가 언제나 사랑받았고, 사랑을 배우며 자랐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