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맛집입니다.

봄길책방

by 작은 의미

인생 영화

“고향으로 가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여주인공의 눈물 머금은 결연한 독백. 그리고 장면은 바뀌어 그녀는 붉게 타오르는 대지 위에 서 있고 웅장은 음악이 흐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마지막 대사와 장면이다.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재상영된다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친구와 함께 극장에 갔으나 좌석은 이미 매진되었다. 그때는 입석표도 있던 시절이었다. 4시간 가까운 시간을 계단에서 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보았다.

우리 말고도 영화관은 서서 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함께 기억 속 필름으로 남는 장면이다.

여리고 약했던 여주인공이 절망의 끝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마지막 대사는 힘들고 지칠 때 대지를 붉게 적신 노을과 함께 아련히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여행을 가도 노을 명소를 찾아다니곤 했다.



노을 맛집을 찾아서

남편과 부산에 갔을 때였다.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며 잠깐의 시간이 남아 선택한 곳이 을숙도였다. 전철과 택시를 타고 을숙도로 들어갔다. 가을과 겨울 사이의 어느 날, 고요한 섬에는 철새가 주인이었다.

섬 한 바퀴를 천천히 걷고 있는데 하늘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하늘은 보랏빛으로 변하더니 낙동강으로 휘돌아 풀어졌다. 붉게 물든 노을은 보았어도 온통 진한 보랏빛 노을은 처음이었다. 지구 밖 어느 별나라 같았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하늘만 보았다. 정해진 기차시간으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데 자꾸 뒤돌아 보느라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보랏빛 하늘이 흑암으로 변하고 나서야 기차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보라카이에서의 석양은 수평선 끝으로 서서히 다가간다. 바다는 하루동안 수고한 태양을 팔 벌려 품는다. 바다도 붉게 물든다. 태양과 바다 수면 위와 맞닿을 때 그 앞을 가로지르며 떠다니는 요트는 곧 불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했다. 드디어 태양은 바다로 풍덩 빠져든다. 노을 진 해변가 자유로운 여행자들의 모습이 어우러졌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포루투 모루 언덕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도우강으로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진한 포토와인 한 잔을 태양에 부딪힌다.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버스킹 음악도 고조된다. 노을 때문인지, 와인 때문인지 볼도 불그레 졌다.



이곳이 노을 맛집

언덕 위 책방 마당에서는 서쪽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염하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는 강화의 크고 작은 산이 물결처럼 흐른다.


'이쪽이 서쪽이지? 그럼 석양을 매일 볼 수 있겠네?'


매일 노을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두근거렸다.


‘책방 전면은 세모 통 창을, 서쪽으로는 네모 통 창을 만들자. 책방 안에서도 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자.’


집 설계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집이 완공되고 이사를 오면서 드디어 내가 찾아다니던 노을을 매일 볼 수 있게 되었다.

매일 보는 노을이 매일 다른 그림을 그렸다.


노을의 색깔과 화려함은 공기 중 수증기, 미세입자, 구름, 태양의 고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는 주황색 휘장을 두른다. 구름이 있는 날에는 구름에 따라 그림이 된다. 붉고 푸른 새털이 날갯짓하기도 하고 큰 도화지에 마블링해 놓은 것 같은 날도 있다. 붉은 무대 위 마술사가 불피리를 부는 듯 홀연히 올라오는 푸른 구름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온통 구름으로 뒤덮인 흐린 날에는 불그스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듯하다.


낮의 길이에 따라 해가 내려앉는 자리도 변한다.

강화 산등성이 높고 낮게 이어져 있다. 봉우리의 물결 위에 매일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며 앉는다. 산봉우리의 높낮이에 따라 어떤 날은 조금 빨리, 어떤 날은 조금 늦게 산 아래로 넘어간다.

마치 산 뒤 제집인 양 서서히 내려가다가 마지막 ‘안녕’ 하며 꼴딱 들어간다.


낮의 길이가 긴 여름에는 해도 더 긴 시간 하늘에 떠 있다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앉는다. 이때는 서쪽창 한가운데까지 들어온다.


가을이 깊어지기 시작하면 해는 점점 책방 가장 가까이로 한 발자국씩 옮긴다. 더 크고 더 붉은 태양이 성큼 다가와 그림자도 더 깊고 짙어진다.


동지쯤에는 드디어 책방 정면의 삼각 통창 꼭짓점을 찍고 내려온다. 하지와 동지를 기점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변한다는 것은 알았어도 이렇게 해 지는 시간뿐만 아니라 앉는 자리의 변화까지 똑똑히 바라보며 느껴보지는 못했다.



붉은 노을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하게 달구어졌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다시 만나.’ 토닥이며 건네는 위로 같았다.


책방은 노을 맛집이 되었다. 어떤 손님들은 그 시간만 기다리고 앉아 있다. 노을이 유난히 예쁜 날에는 우리가 책방 안에 있는 손님에게 “노을 보러 나오세요~”

노을 앞에 어깨를 마주한 두 여인, 머리 위 하트를 만드는 친구, 의자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는 이, 호수로 불난 하늘에 물을 뿜어대는 아이들.

노을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는 손님들, 그런 손님들의 뒷모습을 남기는 책방 주인, 노을 앞에 서 있는 모두가 자연의 일부가 된다.


노을은 매일 다른 그림을 그리며

오늘의 안녕과

내일의 희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