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가 되어 드립니다.

by 작은 의미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엄마가 누런 종이봉투를 들고 오셔서 벽장 속에 넣어두셨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 몰라도 된다며 싱긋 웃으셨다.

추운 겨울, 새벽송 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낮에 벽장에서 넣어둔 봉지를 꺼내 들고 문 앞으로 나갔다.

성탄 송가가 끝나고 축복의 인사를 나눈 후 엄마는 커다란 포대 속에 들고나간 봉지를 넣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교회에 가면 여러 가지 과자가 담긴 보따리를 한 아름 안겨 받는다.

지난밤 집집마다 새벽송을 돌며 모은 과자들이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 어린 나에게는 크리스마스는 가끔 손님이 오시는 날과 더불어 흔치 않은 잔칫날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크리스마스 날이면 어김없이 선물을 준비해 두었다. 딸이 일곱 살쯤 되자 산타의 존재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초등학생이 되자 산타는 꿈과 판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딸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난 산타할아버지가 진짜 계신다고 믿어. 올해도 산타할아버지께 00 선물을 주실 거야.”

뻔뻔스럽기까지 한 딸 덕분에 우리 부부는 웃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유치원 아이들은 저마다 산타할아버지께 받은 선물 자랑으로 신이 난다.

대개 유치원 다닐 때까지는 산타의 존재를 믿고, 초등학생쯤 되면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물론 가정에서 어떻게 해 준비해 주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1년 전 크리스마스 날이다. 북스테이 손님은 두 딸이 있는 가족이었다.

밤이 깊어 갈 즈음, 마당을 서성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CCTV 화면 속에는 산타클로스가 책방 밖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스테이 가족의 아빠였다. 책방 뒷문으로 나와 중정에서 산타복으로 갈아입은 듯했다. 중정 문을 나와 책방 앞문으로 향하던 산타 아빠는 입구에서 손을 흔들다가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다시 나와 책방을 빙 둘러 뒷마당으로 사라졌다. 아이들을 위한 아빠의 마음이 흑백 화면 속에서도 빨간빛으로 보였다.



다음 날 남편이 어제의 이벤트에 대해 물었다.

“어제 즐거운 이벤트 되셨어요?

“망했어요. 아빠인 줄 다 알았어요.”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산타 대신해 드릴 수 있었는데요. 하하하”

넉넉한 체격과 넉살스러운 말투까지, 남편은 산타로서 제격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북스테이 예약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기억하시나요? 작년 크리스마스 산타 아빠예요. 올해는 사장님께 산타 부탁하려고요”

잊고 있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나도 덩달아 설렜다.

크리스마스 날 오후, 그 가족이 다시 책방을 찾았다.


반가우면서도 고개가 갸웃했다. 딸들이 눈에 띄게 자라 있었다. 특히 큰 딸은 아무리 어려도 중학생쯤 되어 보였다. 작년에도 딸들이 아주 어리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는데, 다시 보니 더 의아했다.

‘아직도 산타를 믿는다고?’


저녁이 되자 아빠는 몰래 차에서 상자를 옮겨 놓았다.

선물 상자와 함께 산타 의상과 모자, 수염이 가지런히 담긴 상자였다. 여러 해 동안 크리스마스마다 사용하고, 정성껏 보관해 온 흔적이 역력했다.

곧 문자가 왔다.

“첫째 아이의 이름은 Y고요. 황토색 가방이에요. 둘째는 E고요, 초록색 가방이에요. 아빠가 산타인 줄 알고 있을 텐데 아이들이 깜짝 놀라겠어요. ㅎㅎ 잘 부탁드립니다.”


남편은 아이들 이름을 불러 가며 산타 연습을 했다. 밤 10시가 다 되어 산타복으로 갈아입고, 커다란 선물 두 개를 보따리에 담아 책방으로 향했다. 역시 찰떡같이 어울렸다.



책방에서는 가족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남편이 책방 안으로 들어가자, 산타를 본 엄마의 놀란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혹시 아이들이 눈치챌까 봐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Merry Christmas!”를 외치며 마당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남편 산타의 뒷모습이 보였다. 춥다며 어서 들어오라고 하자, 창문으로 아이들이 보고 있다며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한참 후 남편이 돌아왔고 아이들 엄마의 메시지도 도착했다.

“오늘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산타를 만난 아이들은 잠깐 놀라는 눈치였지만 이내 덤덤했다고 한다. 대신 엄마는 동심으로 돌아가 놀라고 기뻐하며 분위기를 띄웠다고 했다.


아이들이 산타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에게 기쁨을 남겨주고 싶은 엄마 아빠의 마음, 덕분에 즐거운 추억으로 남은 기억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테니까.

책방지기는 크리스마스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산타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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