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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Dec 12. 2023

외자 이름은 어찌하여 이토록  애잔한가요

한 글자 이름의 매력과 특별함, 드라마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는 2016년 SBS에서 방영된 20부작 드라마다. 이준기, 아이유 주연에 잘 생긴 남자조연배우(지금은 대부분 주연급으로 커버린)들이 대거 등장해서 화제성이 충분했음에도 당시 주변에서 이 드라마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는데, 나는 유독 인기 없는 드라마나 영화를 감명 깊게 보는 일이 잦아 혼자 꿋꿋이 본방 사수를 했다. 주연배우 이준기의 오랜 팬이기도 했고, 판타지가 살짝 가미된 시대극은 평소 좋아하는 장르라 매회 놓치지 않고 열심히 봤다.


방영이 종료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요즘도 가끔 <달의 연인>을 다시 본다. 이 드라마는 주요 인물들이 무지막지하게 죽어나가고 도무지 행복하게 잘 사는 커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마무시한 새드 스토리다. 엔딩까지 가차 없이 눈물바다로 장식이 되어 드라마가 방영되던 당시 너무 가슴이 아프고 슬픈 여운이 오래 남아 매회 시청하기 두려웠을 정도였다. 감성이 풍부하다 못해 넘쳐나는 나 같은 성격은 이렇게 조금의 희망도 없이 슬픈 작품을 보고 나면 한동안 주인공들의 감정에 빠져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그렇게 힘겹게 본 드라마이건만, 볼 때마다 너무 마음 아파서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 날이면 <달의 연인>을 다시 찾는다. 나는 울적한 기분이 들면 깊은 지하 땅굴 속으로 한없이 들어가서 바닥을 만나야만 다시 올라올 수 있는 사람이다. 도저히 이보다 더 우울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감정의 심연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끝없이 가라앉고 한없이 침잠하며 조용히 에너지를 충전한 후 조금씩 다시 빛을 보러 올라오는 타입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드라마 중 하나인 <달의 연인>은 이렇게 우울할 때 몇 번이고 보는 작품이다. 드라마 초반에는 코믹한 요소도 많고 알콩달콩 러브라인도 풍부해서 잠시 시름을 잊고 미소를 짓다가도, 내용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주인공들의 숱한 눈물과 안타까운 엇갈림에 잔뜩 이입되어 우울감의 바닥까지 내려간다.


마음에 몸살이 날 정도로 지독하게 슬픈데도 날 설레게 하는 요소들이 많은 드라마, <달의 연인>에는 유독 이름이 외자인 인물들이 많다. 허구적인 요소가 가미되긴 했지만 고려 건국 초기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태조 왕건이 등장하는데, 왕건은 물론 그의 아들들인 황자들도 이름이 외자이고, 여주인공인 아이유도 성이 해, 이름이 수, 외자다.


조선시대 임금들의 이름도 건국 초기 이성계, 이방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외자인데 이는 과거 왕조시대에는 왕의 이름을 백성들이 감히 똑같이 쓸 수 없다 보니 백성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이 있다. 임금의 이름이 두 글자인 것보다는 한 글자인 편이 백성들의 이름과 겹칠 확률이 줄어들 테니 말이다. 임금의 이름에 사용하는 한자도 같은 이유로 잘 쓰지 않는 글자나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어서 지었다고 한다.


드라마 속 고려 황자들의 이름도 조선의 임금들과 같은 역사적 유래를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자 이름이 주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왕족의 이름'에 걸맞은 고급스러움, 한 글자 성과 두 글자 이름이라는 일반적 규칙에서 벗어난 이질적 느낌, 똑같이 규칙을 벗어나지만 성이 두자이거나 이름이 세 자 이상으로 긴 이름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한 글자 이름만이 주는 묵직한 매력.


<달의 연인>에 나오는 주요 황자들의 이름이 왕무, 왕요, 왕소, 왕은 등 외자인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배우 강하늘이 맡은 여덟 번째 황자인 왕욱이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유려한 붓글씨로 종이에 써 내려가며 본인 이름의 뜻을 여주인공에게 알려주는 장면은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현대에서 고려로 타임슬립을 해 와서 한자를 전혀 못 쓰는 여주인공 해수. 그녀와 사랑에 빠진 황자 왕욱은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쥐고, 또 다른 손으로는 어설프게 붓을 잡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이름 한 자를 부드럽게 동시에 날렵하게 써 내려간다.



이것은 무슨 글자입니까?
내 이름. 욱.
아침에 뜨는 해를 뜻한다.



그녀는 은애하는 이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인다. '아침에 뜨는 해. 욱......'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상대의 이름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단어가 또 있을까. 그 이름이 한 글자라서, 게다가 뜻이 찬란하기까지 한 '아침에 뜨는 해'라서 더욱 근사하고 설렌다.

 

여주인공의 이름도 외자라서 더 애틋하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아이유를 '해수'라고도 불렀다가 '수'라고도 부르는데, 특히 그녀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장면이거나 반대로 너무나 슬픈 장면에서 '수'라는 외자가 가진 아련하면서 쓸쓸한 매력이 도드라진다.


해수의 이름이 가장 슬프게 들렸을 때는 또다시 내 최애 캐릭터 왕욱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왕욱 해수가 멀리 떠나버린 걸 뒤늦게 알고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는 방에서 망연자실한 채 절규하는 장면.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하다가 마침내 그녀의 부재로 인한 아픔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울부짖으며 그가 외치던 이름 "수야!!!!" 만일 그가 "해수야!"라고 외쳤다면 그 절절한 슬픔이 이토록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의 마지막 역시 그녀의 이름으로 마무리된다. 해수는 첫사랑이었던 왕욱과 이루어지지 못했고, 두 번째 사랑이자 고려의 황제 광종이 된 황자 왕소와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고 만다. 배우 이준기가 연기한 강렬한 캐릭터인 왕소는 해수가 다른 세계에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갈 것이라고 다짐하며, 목숨 걸고 사랑했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연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른다.


나의 수야.
 

마지막 대사가 "나의 해수야." 였다면 이토록 여운이 오래 남지 않았을 것 같다.



아름답고 슬픈 이름들로 가득했던 드라마 <달의 연인>은 오래도록 내 어두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남편도 나를 외자로 부른다. 내 이름 '보미'를 종종 줄여서 '봄'이라고 부르는 그, <달의 연인> 속 욱이나 왕소가 수를 부를 때처럼 아련하고 애절한 마음인가 아니면 그저 이름 두 자 다 부르는 게 귀찮아 줄여서 부르는 것인가.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제목 및 본문 사진 : SBS <달의 연인>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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