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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May 12. 2020

5월에는 부석사에 선비화가 핀다

부석사 조사당에는 의상대사 지팡이가 자란 선비화가 꽃을 피운다

경북 영주에 가면 천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는 부석사가 있다.

신라 문무왕 16년 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그 해 676년.

의상대사는 왕명에 따라 부석사를 창건하게 된다.

부석사가 이곳에 새워지게 된 것은 삼국통일 후 세 나라의 접경지였던 

영주 주변의 민심을 위로하고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석사는 국보를 다섯 점이나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다. 뿐만 아니라 보물 또한 다섯 점이나 있다.

또한 부석사가 자리한 모양도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산의 기울기에 맞춰 층층이 계단을 쌓고  널찍한 공간을 만들어  

전각이 하나씩 들어앉았다.

이 천왕문을 통과하면 회전문만 보이고 

회전문을 통과하면 범종루만 보이고 범종루에서 고개를 빼도 

안양루는 비스듬히 비켜 앉은 듯 제 모습을 감추고 있고 

무량수전도 지붕만 살짝 보여준다.

부석사는 양파껍질 벗기듯 하나하나 차례차례 제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곳이다.

매표소에서 일주문,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선 은행나무는 

봄부터 여름까지는 초록 터널을 만들고, 가을에는 노란 터널을 만들어 준다.

산을 오르지만 오르막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범종루가 앞면과 옆면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돌계단도 사실은 길이가 같다는 것,

음수대 옆에 서면 안양루에 공포 불 다섯 분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석등이 서쪽으로 살짝 치우쳐 세워져 있는 것이

부석사를 오르는 이들에겐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부석사 돌계단이 108개인지 헤아려보겠다 늘 생각하면서도

경치를 보다가 사진을 찍다가 그러다 보면 잊어버리고 만다.

굳이 불자가 아니어도 부석사는 산책길로도 멋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절을 들어앉은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발길을 돌려 내려간다.

무량수전을 뒤에 두고 돌아서면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감탄이 절로 난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석양이 내릴 때는 감탄조차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5월에 부석사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무량수전 동쪽 삼층석탑 뒤쪽으로 난 산길을 백 미터 정도 걸어서 

조사당을 가보기를 추천한다.



조사당은 작은 건물이지만 두 개의  국보가 있다.

조사당도 국보이고 지금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진 조사당 벽화도 국보이다.

이곳은 의상대사가 지냈던 요사채라고 한다.

물론 신라시대 건물이 아니고 고려시대 새로 지어진 건축양식이다.

조사당 뜰에 철장에 갇힌 나무가 있다.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라서 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있는 선비화 일명 골담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상대사가 도를 통하고 서역 천축으로 돌아가면서 사용하던 지팡이를  

요문 앞 처마 안에 꽂고 지팡이에서 가지와 잎이 자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라고 

말했다고 한다.

1300년이나 전의 일이니까 사실 믿기 힘든 일이다.

2미터가량되는 나무줄기가 처마 아래 뜰에 뿌리를 내렸으니 

비도 이슬도 마금지 못했을 텐데 그리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게 놀랍다.

뿐만 아니라 줄기 굵기는 손가락 굵기보다 조금 더 굵다.

마디마디마다 가시가 있다.

그런데 선비화는 나무 굵기가 긁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라면 그 가지는 죽고 새 줄기가 나와서 

세대교체를 하며 이어간다고 하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퇴계 이황이 1548년 풍기 군수로 부임해 부석사를 찾았을 때 

선비화를 보고 지은 시가 전해진다.

비도 이슬의 은혜를 입지 않고도 자라는 선비화를 보고 지은 '선비화'시가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선비화가 석가탄신일 즈음에 꽃을 피운다고 한다.

노란 꽃이 새의 부리 같기도 하고 버선 같기도 하다.

부석사를 몇 번 다녀왔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선비화가 꽃 핀 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운 좋게 꽃을 보았다.

선비화를 처음 보았으니 놀랍다 하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어쩌면 다시 볼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 욕심이 난 것이다.

국보인 조사당보다도 꽃 핀 선비화가 내겐 더 신기했다.

5월이면 꽃이 피는 선비화가 일제강점기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한다.

8.15 광복과 함께 다시 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절개까지 굳은 선비화가 왜 창살에 갇혔을까?

그건 선비화 잎을 달여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선비화 잎을 따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보호 차원에서 그렇게 해 두었다고 한다.

선비화의 꽃말은 청초, 겸손이다.


조사당 오르는 길은 진짜 산속 길이다.

그래도 길이 잘 전비되어 있어서 하이힐이 아니라면 오르는 데 문제가 없다.

참 조용하고 평화로운 길이다.

길 가 곳곳에 방문객들이 쌓아 올린 돌탑이 있고

키 큰 나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눈부시다.

돌아내려 오며 삼층석탑 위에서 부석사를 내려다봐도 "아 좋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저 서 있는 듯 보이는 이 삼층석탑도 실상은 보물 제249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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