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대하여

<폭싹 속았수다>의 이름들

by 최익석bomiromi

인간은 문자를 발명하고 이를 말(언어)로 그 의미를 구현하여 전달할 수 있는 지구상 유일한 생명체다. 우주에 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있어 그들도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면 모를까 2025년 3월 이시간, 아직까지는 호모 사피엔스는 우주에서조차도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다.


문자를 사용하는 인류가 기록상 남겨 놓은 최초의 이름은 '쿠시림(Kushim)'이라고 한다. 기원전 3100년 경 메소포타미아 우르크 지역에서 발흥한 수메르 문명의 점토판에 남아 있다. 행정 관리 또는 회계 담당자의 이름으로 추정된단다. 또는 그 직책이나 직업일 가능성도 있다고. 사물에 붙여진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도 역시 비슷한 시기,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점토판 속에 있다. '기루쉬(girush)'라는 것으로 특정 상품이나 또는 곡물의 명칭일 수 있다.


성경 속 최초의 인간의 이름은 당근, 창세기(Genesis)의 '아담(Adam)'과 '하와(Chavah, Eve)'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 또는 '흙'이라는 뜻이고 하와는 '생명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물에 붙인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神)이 직접 명명한 '낮'(빛)과 '밤(어둠)', 그리고 '물'과 '궁창(하늘)'이 있다. 유대인 사회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이야기'인 창세기가 문자로 기록된 시기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폐(Babylonian Captivity) 기간 중이었으므로 수메르 점토판이 만들어진 때와는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인간 세상에서 이름이 없는 삶이나 문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은 이름을 갖는다. 아니, 인간이 이름을 붙여 놓았다. 우주를 탐험하는 무인 우주선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지구로 알려오면 그 무언가에도 이름(최소한 기호로라도)을 붙이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대자연 속 아직까지 인간의 눈에 띄지 않은 물체나 생명체가 있다면 모를까 적어도 눈에 띈 순간 이름을 지닌다고 보면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는 나에게로 와서' 그 이름대로 존재하는 거다. '그'는 그 이름과 이름이 가지는 이미지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우리와 함께 존재하며 언젠가 우리가 지구상에서 사멸한다면 그 또한 함께 사라질 것이다.


싱어송라이터 곽진언은 2014년 <슈퍼스타 K6>에서 자작곡 <후회>라는 곡을 들고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음의 진정성 있는 보이스로 평범치 않았던 성장기(초중고를 모두 홈스쿨링, 검정고시로 마쳤다.)를 담은 듯한 자기 노래를 담담하게 읊조리며 첫 관문을 통과하더니 기어이 우승까지 일궈냈다. 당시 준우승자는 보컬 괴물 김필.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 되는 게 몇 가지 있지/죽도록 기도해 봐도 들어지지 않는 게 있지

열심히 노력해 봐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있지/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 되는 게 몇 가지 있지


그중에 하나 떠난 내 님 다시 돌아오는 것/아쉬움뿐인 청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사랑하는 우리 엄마 다시 살아나는 것/그때처럼 행복하는 것"(곽진언, <후회> 중)

당시 스무세 살(23)의 곽진언이 부르는 가슴 저미는 가사의 노래에 심사를 맡던 선배 가수들의 감동 받은 얼굴을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곽진언이 반도를 들썩이게 함은 물론 바로 지금, 2025년 3월,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청률 1위'를 단숨에 움켜쥔 화제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노래 하나 심어 놓았다. 곡목은, 이름하여 <이름(Name)>이다.


"하염없이 그댈 생각하면/생각할수록 선명해지는

초라한 나의 마음 하나/언제나 처음과 같은 기다림 하나


이름을 불러주세요/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아요

가끔 짓궂은 농담 같은 이 세상에 우리

또 한 번 길을 잃고/다시 기다린대도 괜찮아요 음

그대는 항상 나의 곁에/나란히 걷고 있으니

웃고 있으니"(곽진언, <이름(Name)> 중)


<폭싹 속았수다>에는 숱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많은 인물들만큼이나 당근, 많은 이름들이 드라마 속에서 오간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독특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고 이들의 대사나 표정, 행동 등이 모두 서사 전개에 필연적 인과 관계를 지닌다. 허투루 지나치는 인물이 없다. '애순(문소리)'이 좌판을 차린 시장에 어린 여자 아이를 데리고 오징어를 사러 온 단역(으로 보였던) 젊은 엄마조차 막판에 1인 2역의 기막힌 반전을 가져오는 식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보지 않으면 말로나 문자로 특정 이름이 나오는 순간 "오잉? 누구지?" 하기 십상이다.


이들 인물들 중 일부의 이름은 개인적으로는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다른 이야기 판에서 이미 썰을 한 번 푼 적이 있다.) 오래전 돌아가신 울오마니 이름이 김. 애순(愛順)이다. 오애순(愛純)과는 한 끗 차이다. 양. 금명의 이름은 내 둘째 누이 이름(금영)과 역시 한 끗 차이. 양관석 역의 배우 박. 해준은 울 첫째 사위의 여동생(즉, 사돈처녀) 이름과 같다. 양. 동명은 지금 내가 지역살이 중인 포구 마을 이름 '동명동'과도 같다.


한방의 가장 결정적 이름으로는 양금명, 박충섭(김선호 분)이 천신만고 끝에 얻은 3.6kg짜리 딸 박. 새봄이다. 우주에서 제일 귀하고, 제일 예쁘고, 제일 총명하며, 이외의 그 모든 어떤 '제일'을 끌어다 모아도 부족할 나의 1호 큰딸 <새봄> 이와 같다.(2호의 이름은 새롬이다.) 곽진언의 노랫말마따나 “부르면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 이름들이다. 빛나는 삽입곡 중에는 오프닝 곡 <봄>(김정미 노래, 신중현 작사/작곡)도 있다. 앞선 글에서 역시 이미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같은 이유로 잊을 수 없는 주옥같은 곡이다.

양.금명과 그녀의 딸 새봄.
나의 딸들, 새봄과 새롬(bomiromi),1997.4.20

번뜩이는 대사 중에 익숙한 이름(브랜드)들이 나오며 귀에 콰악 박혔던 것 하나.


극 중 밉상 ‘미숙’(이미도 분)이 우여곡절 끝에 자리

잡아 번창 일로인 ‘세이모 오징어 횟집‘ 바로 옆에 ’ 원조‘ 오징어 횟집이라며 가게를 연다. 세 이모(이제는 두 이모가 됐다.)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가 미숙에게 간판을 내리라고 닦달하자 애순(문소리)이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한다.


“놔둬. 미란다가 옆에 있어야 환타가 잘 팔리는 거야!


미란다. 한때 유명했던 청량음료다. 펩시가 오리지널로 원래의 이름은 ‘미린다(Mirinda)’다. 롯데칠성이 국내 라이선스를 갖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이 저 이름을 알고 있으려나 싶어 서치 해보니 몇 년 전 생산, 판매를 중단하여 이제는 잊힌 이름이 되었다.


환타(Fanta)는 펩시의 경쟁사인 코카콜라가 원조로 여전히 잘 팔리고 있는 음료다. 역시 서치 해보니 의외로 2차 대전 중 나치가 개발했더란다. 독일 내에 공장을 갖고 있던 코카콜라가 전쟁 중에 사업을 철수하자 콜라에 입이 젖어 있던 독일인(나치)들이 대체재로 개발해 낸 것이 Fanta다. 독일어 원어로는 판타지(fantasie). 개발자들이 콜라 맛에 비견되는 음료를 개발해내지 못하자 “상상력(fantasie)”을 발휘하라며 쪼아댄 결과 나온 것이 Fanta라고.(출처: 나무위키)


판타지(fantasie)로 시작하여 리얼리티 신파로 흐르나 싶었는데 드라마는 막판에 다시 해피엔딩 판타지로 돌아간다. 수많은 명대사를 귀와 눈(자막)으로 부지런히 담아내며 어지간히도 눈물을 찍어대는 중에 마눌의끊임없는 잔소리도 함께 견뎌내야만 했다.


“양관석을 좀 봐봐, 이 쏴람아! 남들 앞에서 손만 잡고 다니면 뭐하나?“


덧.

. 감독(김원석)은 삽입곡으로 곽진언의 <후회>를 넣었어도 좋을 뻔했다. 노랫말이 엄마(부모)에 대한 헌정드라마에 제격이다. 특히 이 부분.


“사랑하는 우리 엄마 다시 살아나는 것

그때처럼 행복하는 것“


. 작가(임상춘)는 유명세에 비해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남성적 이름을 갖고 있으나 실제는 여성이라는 얘기도 있다. 여성의 심리나 상황 묘사에 뛰어나고 문체(대사)도 여성적이어서라는 이유다. 배우와 스태프, 감독에게 보낸 최근의 감사 인사를 보면, 아니나 다를까 여성의 감성이 물씬 드러난다. 아무려나. 글과 스토리(서사)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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