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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쌀 Jan 02. 2020

정체불명 추리닝맨

힘을 내요 미스타 고 ('고' 1탄)


‘고’는 첫날부터 아디다스 추리닝을 입고 출퇴근했다. 두 손을 상의 주머니에 찔러넣고 사무실이 춥다며 아기동자가 어깨에 내려앉은 사람처럼 웅얼웅얼하며 걸어다녔다. 고작 11월인데, 앞으로 더 추워지면 어쩌려고 그러나 내심 걱정이 되었다.

사무실 입성 기념으로 '훈'은 딱 멤버수만큼의 슬리퍼를 준비하였다(게스트가 오면 맨발로 있어야 한다). 슬리퍼는 까딱하면 가죽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인조 스멜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포장비닐을 뜯고 납작하게 눌린 슬리퍼에 발을 구겨넣으며 '고'는 말했다.


대표님, 저는 털신을 사주시면 안 될까요?


차라리 돈을 좀 달라고 하는 게 어울릴 법한 표정이었다. 이후로 나는 다이소나 이마트 같은 곳에서 털실내화를 보면 ‘고’가 떠오르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핑크뮬리 같은 털신을 볼 때면 구매욕구가 치솟아 더 괴로웠다. 사다줘볼까? 아니야, 진짜 신고 다니면 어떻게 하려고.



털신들아, 제발 내 눈에 띄지 말아줘



얼핏 보면 ‘고’는 고학력자 동네 백수 같았다(최종 학력이 어찌되는지 나는 모른다). 추리닝 속에 몸을 옹기종기 집어 넣은 채 비염으로 팽팽 코를 푸는 모습을 보면 타고난 한량 같은데, 눈매가 참 지적이고 가끔 매섭기까지 하다. 냉철한, 냉혈한, 냉혹한, 냉정한, 뭐 이런 냉냉냉냉이 잘 어울리는 딱 냉동실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줄만 알았다. 




출판계 있는 동안 남자동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여자동료 하나 없이 일하는 건 참 오랜만이다. ONLY 남자동료들과 일한다고 해서 딱히 불편함은 없지만 한 가지가, 그러니까 딱 한 가지가 나를 매우 힘들게 한다. 


'남자들은 밥을 씹고 삼키는 것일까?'


첫날 식사는 그들도 멘붕이요, 나도 멘붕이었다. 사실 나는 멘파(멘탈파괴) 수준. 밥공기 절반도 먹지 않았는데, 이미 자신들의 식사를 다 헤치운 그들이 내 밥그릇 속 밥알을 세며 말했다. 

“저희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드세요.” 

신경 쓰지 말라는데, 그때부터 엄청나게 신경이 쓰였다. 

“내일부터 저희가 속도를 맞춰야 하겠네요.”

웃으며 '심'이 말했지만 사실상 다음날도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고 하루이틀 더 지났을 무렵, 갑자기 ‘고’가 군대 이야기를 꺼냈다. 빨리 먹는 습관이 군대에서 비롯된 거라고, 시덥지 않은 에피소드를 끝없이 풀어내었다. 


설마 축구한 이야기까지 하시려는 건 아니죠?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나는 군필자들의 군대 이야기가 재밌다(내가 경험하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못할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군대 이야기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귀신들은 어쩜 그렇게 부대에 많이 사는 걸까. 재밌어도 너무 재밌다. 미대 나온 장병 찾아 운동장에 족구라인을 그으라 한다고? 군대 이야기가 쏟아지던 그날 '고'는 나와 비슷한 속도로 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고'는 혼자 배낭여행 간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두어 달 지나자 밥 먹는 속도가 맞춰졌다. '고'가 터는 별의별 과거사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란 걸 깊이 깨닫게 해준 나의 식사력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에는 이런 말도 듣는다. 

"대표님, 좀 천천히 드세요. 이제 저희가 못 따라가겠네요."


 

배울 텐가 밥 빨리 먹는 법? (영화 <인터스텔라> 장면)






우리의 사업이(영업이) 본격 스타트 되기 전, 실질적인 타깃들의 이야기를 깊이 들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타깃들과의 접점이 비교적 적었던 다른 멤버들을 대신해 주로 나의 지인들이 인터뷰이로 대동되었다. 

그렇게 첫 미팅을 앞둔 날이었다. '고'와 나는 다음날 아침 약속 장소에서 바로 만나기로 했다. 자신은 1시간 정도 일찍 가서 질문을 정리하고 책을 읽고 있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지?


나한테도 일찍 오라는 말인지, 자기 책 읽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고 시간 맞춰 오라는 말인지 좀 헷갈렸다. 사실 나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이게 걱정스러웠다. 

'설마... 내일도 추리닝 입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고'가 일찍 온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나도 좀 일찍 가보기로 했다. 약속시간 30분 전에 도착한 카페에는 '고'가 없었다. 아니, 내가 알던 '고'가 아니라 다른 '고'가 앉아 있었다. 


그에게도 정장이 있었다니!


말끔한 정장차림에 넥타이까지 하고서 각진 서류가방을 옆에 두고 앉아 있었다(신기하게 그날 이후로 그는 계속 정장차림으로 출근한다). 나의 지인을 만나는 거였기에 혹시나 추리닝 차림이면 어쩌지 싶었는데 참으로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디다스 추리닝 입고 올까 걱정했었는데..."


예상 가능한 모든 답변을 빠른 속도로 재끼고, '고'는 말했다. 


"아디다스만이 주는 분위기가 있지요."



넌 알아들었니?

"....."


'고'의 이야기는 바로 2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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