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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이 Aug 28. 2021

관계의 정의

아주 어릴 적의 기억 중 유난히 선명한 것들이 있다.

어떤 것은 나를 눈물짓게 하고,

어떤 것은 나를 유쾌하게 하며,

어떤 것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정확한 나이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대충 4살 내지는 5살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어느 겨울,

지하 다방 건물 3층에 있던 작은 집은 사진으로 찍은 듯 내 기억에 선명하다.


집을 나서서 오르막을 올라 왼 편으로 꺾은 채 그대로 직진. 그렇게 짧은 종종걸음으로 걸으면 그다지 크지 않은 삼거리 코너에 위치한 작은 수족관은 내 또래 어린 아이들부터 초등학생 언니, 오빠들에게까지 인기장소였다.


물고기, 거북이부터 햄스터, 기니피그, 토끼, 앵무새, 이구아나 등 다양한 생물을 판매하던 그 곳에서 누군가는 애완동물을 사 가고(당시에는 반려동물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다) 나처럼 집에서 동물을 기를 형편이 되지 않는 아이들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외부 철장에서 길러지던 토끼나 햄스터를 구경하거나 창문 너머로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들을 입 벌리고 구경하곤 했다.


그 곳은 정말 마법의 세계같았다. 작은 눈으로 볼 것이 얼마나 많던지, 첫번째 어항부터 밖의 토끼 사육장까지 하나하나 다 돌아보며 안녕, 안녕, 인사를 건네다보면 시간은 훌쩍이었다.


그 날도 엄마와 함께 그 곳을 지나치던 나는 불 꺼진 수족관 안의  작은 햄스터에 시선을 사로잡혀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저녁거리를 장만하는데 정신이 팔렸던 엄마는 그런 나를 보지 못했다.

한참을 구경하다 고개를 들었는데, 아뿔싸! 엄마가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엄마와 비슷한 사람조차 눈에 띄지 않자 덜컥 겁이 났다.


2000년대 초반의 안전교육을 엄마로부터 성실히 받은 나는 엄마가 없어지면 길이 어긋나지 않도록 제자리에 앉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철푸덕, 수족관 문턱에 걸터앉았다.


쪼그린 다리에 턱을 괴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쫓으며 또 시간이 흘렀다. 무서움에 속으로 세기 시작한 숫자는 이미 100을 넘긴지 오래. 아마 몇몇 숫자는 건너 뛰었을 것이다. 더는 셀 수 없을 만큼 큰 숫자를 센 후에도 엄마가 보이지 않자 갑자기 목이 간질간질 메어왔다. 울음이 나오기 전의 느낌이라는 것을 알았다. 울지 않는 씩씩한 어린이가 최고라는 배움에 익숙했던 어린 나는 자꾸 올라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었으나 한번 길이 나기 시작한 눈물은 자꾸만 흘러내렸다.


한참을 소리없이 훌쩍대던 내 앞에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그 남자는 내 앞에 쭈그려 앉아 시선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왜 여기에 혼자 있는지, 엄마는 어디에 있는지 등의 물음을 했던 것 같다. 대답을 했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도 없이 혼자 남겨진 상황에 만난 낯선 사람이었기에.


짧은 대치 끝에 그 남자는 잠시 사라졌다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이 순간은 분명히 기억난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경찰아저씨들이 엄마를 찾아줄테니 경찰아저씨에게 가자고. 어린 생각에도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었다. 기다려도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 남자는 내 작은 손을 잡고 짧은 나의 보폭에 맞추어 나를 경찰서로 데려다 주었다. 경찰이 다가와 내게 엄마의 연락처를 물었다. 집 전화번호를 경찰에게 알려주었다. 엄마가 집에 없다는 걸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경찰서 소파에 앉아 얼마가 지났을까, 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가 달려 들어왔다. 엄마의 얼굴을 보며 울었던건 나 혼자로 기억한다. 엄마는 울지 않았다. 그저 어디에 있었는지 물었다. 울면서 햄스터를 보고 있었다고 답하자 엄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던 것도 같다. 그리곤 내게 너를 이대로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고, 여기저기 많이 찾아다녔다고 하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멀쩡히 잘 걸을만큼 다 큰 녀석이 어리광을 부리냐고 나를 잘 안아주지 않던 엄마였는데 그 날은 엄마에게 안겨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나중에 엄마는 이 날 나를 찾아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딱 한 곳, 수족관만 제외하고. 그러면서 나를 경찰서에 데려다주고 홀연히 사라진 그 남자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나를 찾은 후 혹시나 그 남자가 이상한 사람이었으면 어쩔뻔 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심장이 내려앉았었다고.


내가 불만스럽게 "엄마는 울지도 않았잖아. 나는 무섭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엄청 울었는데." 했더니 엄마는 "니 찾을때는 울었지. 근데 니 경찰서에 있다고 연락 받고 나서는 안 울고 들어갔지.니 놀랠까봐."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안 울었던 건 아니네." 하자 엄마는 자식 잃어버리게 생겼는데 제정신일 엄마가 어디있냐고 했다. 그냥 고개만 두어번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이 날의 감정은 내게 공포스러움, 무서움, 불안함보다 안도감으로 더 크게 기억된다.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도 나를 경찰서로 데려다 주겠다며 내민 낯선 이의 손, 그리고 나를 진정시키던 경찰과 문이 열리고 뛰어 들어오던 엄마의 모습인 걸 보면 오래 걸렸을지라도 엄마는 날 데리러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엄마가 사라졌다는 불안감을 덮었나보다.


이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잡아주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고집이 세지면서 엄마와 트러블을 빚을 때에도, 사이가 나빠져 몇 날 며칠을 말 한 마디 않을 때에도,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이 집을 떠나 독립을 하겠다 선언하며 엄마로 하여금 뒷목을 잡 만들었을 때에도 이 날의 기억이 결국은 가장 마지막에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그래.

엄마와 내 사이는 결국 이런 것 아닐까.

내가 나의 즐거움에, 나의 꿈에 정신이 팔려 엄마에게서 멀어져만 가는 동안 결국 나를 찾을 길을 헤메는 건 엄마다. 앞으로도 그건 엄마일 것이다.


이 글을 쓰다 문득 이건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하고 으슬으슬 춥다며 이불을 덮고 누운 엄마를 흘긋 바라본다. 괜히 또 이렇게 마음이 아리다. 별 것 아닌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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