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울지 않았다
1300만 명이 넘은 뒤에야,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미 수많은 쇼츠와 인터뷰를 본 상태였고,
슬프다는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뒤였다.
그래서인지
마음을 조금 준비하고 들어갔다.
나는 보은에 산다.
이곳에는 ‘세조길’이 있고,
정이품송이라는 소나무도 있다.
세조가 지나갔던 길,
그가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영월은 단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고,
지역은 활기를 띤다고 한다.
그건 축하할 일이고,
기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세조가 지나간 길목에 산다는 이유로
어딘가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은 마음까지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일 뿐이니까.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보면서
단종과 세조를
선과 악으로 나누어 보기는 어려웠다.
한명회는 빌런처럼 등장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세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위를 빼앗았고,
많은 피를 흘리게 했지만
그 또한 자신의 선택 속에서 살아간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왕이 되었지만,
과연 행복했을까.
노년에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며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를 단순히 미워하기는 어려웠다.
왕이 밥을 먹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나는 반찬을 보지 않았다.
그 밥상을 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지를 먼저 떠올렸다.
이건 누가 산에서 캐온 것이고,
저건 누가 어떤 계절을 지나 얻어온 것이고,
그런 이야기들이 하나씩 쌓여 있는 밥상이었다.
그건 음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 시절,
왕과 백성이 함께 밥을 먹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는
왕과 여인이 마주 앉아
밥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면이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사육신이 나오는 장면에서도
나는 무섭지 않았다.
피가 떨어지고,
고문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인데도
이상하게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들고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종을 위해 죽었다기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단종은
그 죽음을
자신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나를 원망하지 말라”는 말은
왕의 말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하는 부탁처럼 들렸다.
절벽 위에서
단종이 뛰어내리려 했을 때,
그를 붙잡은 것은 촌장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그가 단종을 위해 행동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단종이 죽으면
그를 유치한 마을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종을 살린 것이 아니라,
마을을 살리기 위해 붙잡은 것에 가까웠다.
그때까지의 촌장은
연민보다는
감시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신의를 따라 선택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죄책감을 견디고 있었고,
누군가는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단종도,
세조도,
사육신도,
촌장도.
누가 맞고 틀리다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이유로 선택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 영화에서
울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끝내고 싶었고,
누군가는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선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