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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을기억해 Apr 25. 2022

다만 할 뿐.

<파리는 날마다 축제>로부터 뻗어나간 생각과 감정의 편린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여행하고 들떴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던 것은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다 읽었을 때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어느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대목에서였을 것이다. 싸늘한 주검이 된 헤밍웨이는 불과 석 달 전까지 파리에 대한 글을 매만지고 있었다. 삶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애틋했던 시간을 추억하던 노인이 돌연 생을 마감하기로 결정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질문 앞에 한없이 먹먹해진 가슴을 달래야 했다. 필시 늦은 시간에 읽다 보니 너무 과몰입한 면도 있었으리라. 분위기에 취한 나는 제멋대로 그가 글을 쓰는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반짝이던 파리 시절을 회상하며 미소 짓고, 이제 다시는 그 순간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으며 슬퍼진 헤밍웨이. 그 시간들을 어떤 이야기로 마무리할지,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묘사할지 고민하며 원고를 붙잡아보지만 마음만큼 글이 안 써지는 것에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 세세하게 글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즐거워졌다가도, 잘했던 것과 잘못했던 것들이 그의 눈앞에 선명히 새겨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는 모르던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을 테니까. 씁쓸함을 억지로 삼키면서, 그럼에도 어떻게든 그때의 일들을 세상에 없던 것으로 하고 싶지는 않기에 끝끝내 기록으로 남기고야만, 기록의 흔적들이 바로 이 글들은 아닐까.


2부 미완성의 원고에서 갈팡질팡하는 헤밍웨이의 모습이 느껴진다는 역자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런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정말로 나의 상상처럼 회한에 가득 찬 심정이었다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잠에서 막 깨서는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라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던 어느 제자의 일화가 새삼 생각났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는 스승의 질문에 대답하는 제자. "그 꿈은 이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반대로 그렇게 했더라면 싶은 순간들이 있다. 안다. 그때 했던 선택들이 그 시절의 나로서는 최선이었음을. 최고의 결정은 아니었을지언정 그 선택들이 그 시절 최대치의 나였음을 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이 속상하리만치 들어맞는 그런 순간들이라는 것도. 그렇게 느껴진다는 건 어딘가 조금은 자라났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단순한 미련일까? 그 모든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생각은 이따금씩 불현듯 떠오르기 마련이다. 바로 오늘처럼. 마음 깊이 꾹꾹 눌러 담았던 시간들이 어떤 계기로 인해 불쑥 고개를 내밀고야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거기에 휘둘릴 만큼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한 것과 다른 선택으로 나아간 다른 세계의 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저 너머 어딘가에는 반대의 선택을 한 내가 있을 거라고.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그와 동전 던지기를 해서 이 쪽에 남은 거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른 선택이 이루어진 삶을 막연히 떠올려본다. 그 선택으로 좀 더 행복할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새로운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를 저 너머의 삶. 그렇게 이리저리 상상과 추억의 한 중간을 오가다가 다른 나에게 농담처럼 혼잣말을 건네보는 건 조금쯤 마음이 추슬러진 후의 일이다. 거기는 사는 게 좀 어때? 여기의 삶도 나름대로 괜찮아. 나와 다른 선택을 한 너의 삶도 꽤나 궁금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툭 혼잣말로 마음을 털고 나면 거짓말 같이 후회와 아련함을 묻어두고 현실의 땅에 발을 딛을 수 있게 된다. 본래 알던 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다만 할 뿐'이라던 어느 스님의 화두가 생각난다. 되돌아볼 시간에, 고민할 시간에 너의 삶을 살라.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것은 내가 반짝이던 순간을 돌아보기보다 현재에 집중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늘 반짝이지는 못할지언정 어느 한순간이나마 만족스러운 내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다시 오늘을 살아도 또 그렇게 오늘을 살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그런 날. 곰곰이 떠올려보면 행복했던 날들은 정작 '내가 지금 행복한가?'를 되묻지 않는 날들이었다. 행복한지 아닌지를 떠올릴 새도 없이 무언가에 열중하며 푹 빠져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삶. 그 관심사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일 때도 있었고, <도덕감정론>을 쓴 애덤 스미스나 <월광>을 작곡한 베토벤처럼 시대를 넘어 위대한 이들을 만나는 것일 때도 있었으며, 요즘 집중하는 글쓰기처럼 내면의 성장을 향한 무언가 일 때도 있었다. 그것들 모두 현재에 집중하며 '다만 할 뿐'인 순간들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다만 할 뿐'과 비슷한 말을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이렇게도 얘기했다. 어떤 면에서 시는 스님이 던진 화두보다 더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느낌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문장을 여기 적어본다.


모두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게 (Let everything happen to you)

아름다움이든 공포든 (Beauty and terror)

계속 전진할 뿐 (Just keep going)

어떤 감정도 마지막은 아니니 (No Feeling is final)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과연, 삶을 먼저 살아낸 이의 말은 묘하게 위로가 된다. 맞다. 그의 말처럼 지나간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현재에 집중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현재에 집중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고, 나를 채워가는 삶. 그런 점에서 내가 반짝이는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 나를 두고 반짝인다고, 혹은 반짝이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다. 다만, 타인의 욕망을 살아내는 것보다 내가 되고 싶은 나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이슬아 작가가 글을 배우러 온 아이들에게 '너는 커서 네가 될 거야. 아마도 최대한의 너일 거야'라고 말한 것처럼 먼 훗날 그만큼 나다워진 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주어진 현실이야 아무렴 어떠랴. '다만 할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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