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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보명 Mar 01. 2017

나홀로 회색빛 헬싱키 스톱오버 (1)

잡으려 했던 겨울의 끝자락에 되려 붙잡힌 이야기

2017. 2. 20. 핀란드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약 5시간의 비행 끝에 두터운 구름을 뚫고 마침내 핀란드를 마주한 순간 떠오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도입부. 어찌하여 따뜻한 스페인을 두고 겁도 없이 이곳에 왔는지 걱정스레 묻는 듯한 새하얀 땅과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녹색 침엽수들의 인사를 받으며 비행기는 헬싱키·반타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2017. 2. 20. 핀란드, 반타, 헬싱키·반타 공항

입대 직전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도, 이번 여름 말라가로 교환학생을 갈 때도 핀에어를 탔으니 벌써 네 번째 방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바로 환승하는 것이 아니라 공항을 벗어나 스톱오버로 하루 이틀도 아닌 5박 6일을 보내기로 했다.


처음 이용해보는 제도인 스톱오버는 편도 비행기표를 2장 예약할 필요가 없는 데다 환승하는 것과 가격도 동일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선택지이다. 주의할 점이 있다면, 환승과 달리 스톱오버는 수하물을 무조건 찾았다가 다음 비행기를 탈 때 다시 부쳐야 한다는 것!


2017. 2. 20. 핀란드, 반타, 헬싱키·반타 공항

말라가 사는 동안 구경도 못한 곱게 쌓인 눈에 감탄한 것도 잠시, 이렇게 내리는 눈에 숙소까지 가는 길과 앞으로의 여행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사진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교환학생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라 캐리어 2개에 배낭에 크로스백까지 짐이 한가득이었지만 24키로 캐리어 1개는 다행히 공항 지하에 로커가 있어 넣어두고 숙소로 갈 수 있었다. 큰 캐리어가 들어가는 보관함은 24시간에 6유로이며 공항 홈피에는 현금 결제도 가능하다고 써있지만 카드로밖에 되지 않았다. 일단 처음 보관할 때 6유로를 내야 하며 나머지는 짐을 찾을 때 결제하는 방식이다.


공항에서 시내는 기차로 30분 정도면 이동할 수 있다. 다만 열차 내부에 캐리어처럼 큰 짐이 있는 승객을 위한 공간 배려가 잘 되어있지 않아 승객이 많으면 불편할 것 같다.


그렇게 헬싱키 역에 내렸을 때도 여전히 눈발은 흩날리고 있었다. 역 내부는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적절히 현대적이면서도 클래식한데, 가장 클래식하다고 느낀 부분은 의외로 출입문이었다. 자동문도 아닌 데다 바닥에 얕은 턱도 있어 캐리어 끄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역에서 숙소까지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눈도 오고 짐도 많아 트램을 탔다. 헬싱키 시내는 걷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다닐 만한 크기인데 그럼에도 트램이 정말 구석구석까지 잘 연결되어있다. 1회권이라도 표에 적힌 시간까지는 여러 번 탈 수 있다고 한다. 자세한 요금 종류 및 설명은 https://www.hsl.fi/en/tickets-and-fares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헬싱키에는 호스텔이 많지 않다. 특히 시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는 정말 몇 군데 없고 물가가 비싼 만큼 숙박비도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비싼 편이다. 이번에 묵은 유로호스텔은 모든 도미토리가 2인실이고 핀란드를 대표하는 문화인 사우나가 아침에 무료였다. 시설이 아주 깔끔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기숙사 같은 구조에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느낌이었다. 조식을 무려 10유로(!)나 받길래 신청하지 않고 장을 봐오기로 했다.


구글 지도에 근처 슈퍼가 나오지 않아 리셉션에 물어보니 트램을 따라가면 금방 나온다고 한다. 역에서 숙소까지 올 때는 트램을 타기도 했고 짐이 많아서 추운 줄 몰랐는데 이제 슬슬 북유럽의 겨울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핀란드 전국적으로는 모르겠지만 헬싱키의 대표적 슈퍼마켓 체인으로는 숙소 근처에 있는 Alepa와 더불어 K-Market, S-market 등이 있고 편의점 개념의 R-kioski도 있다. 확실히 스페인보다 장바구니 물가가 비싸다. 식빵, 햄, 시리얼, 두유, 샐러드, 물 이렇게 샀을 뿐인데 11유로 넘게 나와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리셉션에 10유로의 보증금을 내고 냉장고 열쇠를 받아 사온 것들을 넣어둔 후에 본격적으로 헬싱키의 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입을 수 있는 한 가장 따뜻하게 입었는데도 정말 춥다. 바다가 언 것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 그 위에 눈이 쌓인 것은 더더욱 처음이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관광지인 우스펜스키 성당과 성당 앞에서 저 멀리 보이는 헬싱키 대성당. 이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들이다. 계속 눈이 내렸지만 우스펜스키 성당이 워낙 아름다워서 카메라를 꺼냈다(그리고 곧 렌즈에 눈이 묻어버렸다).


2017. 2. 20. 핀란드, 헬싱키, 마켓 광장

이름부터 '마켓 광장'인 이곳은 하카니에미와 함께 헬싱키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이 열리는 곳이다. 장이 열리면 눈 덮인 고요한 지금의 모습과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다.


광장 한쪽에 있던 돌로 된 거북이들. 다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데 한 녀석만 다른 쪽을 보고 있다. 군대였으면 주위 사람들 고생깨나 시켰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절레절레.


마켓 광장 옆에는 아기자기한 가게와 식당이 모여있는 토리 지구(Torikorttelit)가 있다. 디자인이 유명한 핀란드답게 들어가보고 싶어지는 곳들이 많다. 토리 지구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홈피(http://www.torikorttelit.fi/en/)에서 확인!


2017. 2. 20. 핀란드, 헬싱키, 원로원광장

토리 지구 바로 위로는 원로원광장과 대성당이 위치해있다. 아까 멀리서 볼 때와 달리 성당의 웅장함이 느껴진다. 원래 회색이었을 광장 바닥은 눈이 쌓여 성당과 같은 색으로 바뀌어있었다.


원로원광장 서쪽으로는 헬싱키의 번화가인 알렉산테린카투 거리가 보인다. 10시도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벌써 한적하다.


마켓 광장의 서쪽에는 헬싱키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인 에스플라나디 공원이 펼쳐져있다. 오늘 같은 눈 내리는 겨울밤과 달리 봄여름 날씨가 좋고 따뜻할 때는 헬싱키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공원 옆으로는 길을 따라 고급 카페들과 쇼핑을 할 수 있는 가게들이 늘어서있다.


공원의 눈 맞은 동상들. 마치 밀가루를 뒤집어쓴 모양새라 나를 피식 웃게 만들었다.




2017. 2. 20. 핀란드, 헬싱키, 헬싱키 역

성당들과 함께 헬싱키의 대표 건축물 중 하나인 헬싱키 역. 건축에는 문외한이라 조금 찾아보니 원래 역은 1860년에 지어졌으나 지금의 아르누보 양식―이 뭔지도 사실 잘 모르지만은 핀란드 건축가 엘리엘 사리넨이 공모전에서 우승하여 1919년 완공된 것이라고 한다. 정문 양옆으로 전구를 들고 있는 조각상들이 인상적이다.


다음은 '침묵의 교회'로도 알려져있는 캄피 교회로 향했다. 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길을 잘못 들어 교회 바로 옆에 있는 같은 이름의 쇼핑몰을 먼저 마주하게 되었다. 길을 따라 무려 건물 4개가 이어져있고 버스 터미널과 지하철역도 있는 거대한 복합 공간이다.


교회라고 생각하기 힘든 독특한 미니멀리즘 외관의 캄피 교회는 2012년 세계디자인수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으며 '침묵의 교회'라는 별명에 맞게 내부에서는 대화가 금지된다고 한다. 교회와 쇼핑몰 사이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있다.




이제 다시 에스플라나디 공원을 거쳐 숙소로 돌아가는 길. 원래도 거리에 사람이 얼마 없었는데 11시가 넘으니 마치 새벽 같다.


우스펜스키 성당 앞에는 무민을 탄생시킨 작가 토베 얀손의 이름을 딴 공원이 있다. 이번에 여행기를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토베 얀손이 어렸을 때 살던 집이 근처에 있고 우스펜스키 성당 주변과 이 공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2014년에 그렇게 이름이 붙었단다.




핀란드 공식 여행 사이트의 겨울에 대한 설명

자정이 넘어 숙소에 돌아왔다. 구경하느라 밖에 있었던 것은 4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너무너무 무지무지 아주아주 추웠다. 한국어도 지원하는 저 사이트(http://www.visitfinland.com/ko/) 말만 믿고 왔는데 나는 핀란드인이 아니라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했다.


내리는 하얀 눈이 매서운 칼바람에 떠밀리는 깜깜한 바깥을 떠올리는 동시에 말라가의 날씨를 그리워하며, 방의 온기와 함께 약간은 건조함을 느끼며, 그리고 룸메 아저씨의 우렁찬 코골이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자 금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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