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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미스터리, 빈티지와 떼루아의 비밀

와인 한 잔에 담긴 시간과 땅의 속삭임

by 보나스토리

빈티지, 햇살과 비의 기록

와인 잔에는 햇살과 비, 땅의 숨결과 사람의 손길이 녹아 있습니다. 와인은 시간과 장소가 빚어낸 이야기이며, 그 중심에는 빈티지와 떼루아가 있습니다.

와인 병 라벨에 적힌 연도 1945, 2005, 2016, 이 숫자들은 단순한 제조연도가 아닙니다. 이는 빈티지, 즉 포도가 수확된 해를 가리킵니다. 와인의 제조 연도가 아니라 포도가 자연의 품에서 자란 기후를 담은 시간의 기록입니다. 빈티지는 와인의 성격을 결정짓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포도는 자연에 민감합니다. 햇빛이 풍부한 해에는 당도가 높아지고 알코올 도수가 강해지며 풍미가 깊고 부드러운 와인이 탄생합니다. 반면, 서늘하고 비가 잦은 해에는 산도가 두드러지고 탄닌이 거칠거나 구조가 약한 와인이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2010년 프랑스 보르도는 따뜻한 여름과 적당한 강우량으로 포도가 완벽히 익어 균형 잡힌 와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2011년은 잦은 비로 인해 가벼운 스타일의 와인이 주를 이뤘습니다.

빈티지는 와인의 시절을 말해줍니다. 좋은 빈티지는 오랜 숙성을 거쳐도 그 해의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며, 때로는 투자 가치로 주목받습니다. 와인 마니아들은 빈티지 차트를 보며 그 해의 햇살과 바람이 어떤 맛으로 변했는지 상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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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빈티지, 1945년 샤토 무통 로쉴드

1945년은 와인 역사에 길이 남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프랑스 보르도에서 수확된 포도는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놀라운 생명력을 뽐냈습니다. 특히 샤토 무통 로쉴드(Château Mouton Rothschild) 1945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병 라벨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V” 마크가 새겨졌고, 극소량 생산으로 희소성이 더해졌습니다. 오늘날 이 와인은 경매에서 수만 달러에 거래됩니다. 와인 평론가 마이클 브로드벤트는 이를 “와인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라고 평했습니다. 한 모금 속에는 1945년의 희망과 회복이 담겨 있습니다.


떼루아, 땅의 속삭임

빈티지가 시간의 기록이라면, 떼루아(terroir)는 땅의 속삭임입니다. 프랑스어로 ‘땅’을 뜻하는 이 단어는 토양, 기후, 지형, 미생물, 그리고 지역의 전통까지 아우릅니다. 떼루아는 와인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뿌리를 가졌는지를 말해줍니다.

토양은 와인의 풍미를 형성합니다. 석회암은 미네랄리티를, 점토는 구조감을 더합니다. 기후도 중요합니다. 일조량이 많으면 과일 풍미가 강해지고, 고도가 높으면 산도가 잘 보존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부르고뉴의 샤블리(Chablis)는 석회암 토양 덕에 굴 껍데기를 연상시키는 신선한 미네랄 향을 띱니다. 반면,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까베르네 소비뇽은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에서 진하고 과일 향이 풍부한 와인을 낳습니다.

떼루아는 와인에 지역의 정체성을 새깁니다. 같은 피노 누아라도 뉴질랜드 말버러의 서늘한 해양성 기후에서는 생기 넘치는 체리 향이,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따뜻한 언덕에서는 묵직한 가죽 향이 두드러집니다. 떼루아는 와인을 그 땅의 시로 만듭니다.


상징적인 떼루아, 로마네 콩티

프랑스 부르고뉴의 로마네 콩티(Romanée-Conti)는 떼루아의 정수입니다. 단 1.8헥타르의 작은 포도밭에서 자란 피노 누아는 세계에서 가장 섬세하고 귀한 와인을 만듭니다. 석회암과 점토가 섞인 토양, 완벽한 배수 시스템,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세심한 수확이 이곳의 떼루아를 특별하게 합니다. 한 병의 가격은 수백만 원에서 최고급 빈티지는 수억 원에 이릅니다. 로마네 콩티는 부르고뉴의 언덕과 바람이 빚어낸 “땅의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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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와 와인에 깃든 빈티지와 떼루아

빈티지와 떼루아는 포도 한 알이 와인 한 병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본질입니다. 포도는 시간과 장소의 이야기를 품은 씨앗입니다. 빈티지와 떼루아는 이 씨앗이 어떤 향과 맛, 어떤 개성을 띠게 될지를 결정합니다.

빈티지는 포도가 자란 해의 기후를 기록합니다. 햇빛, 비, 온도차는 포도의 당도, 산도, 탄닌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2016년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키안티 클라시코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기후 덕에 산지오베제 포도가 풍부한 체리와 허브 향을 띠며 부드럽고 균형 잡힌 와인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반면, 2014년 같은 지역은 서늘하고 습한 날씨로 산미가 강하고 가벼운 와인이 만들어졌습니다. 빈티지는 와인의 숙성 가능성과 최적의 음용 시기를 알려주는 시간의 나이테입니다.

떼루아는 포도나무가 뿌리내린 땅의 고유한 특성을 와인에 새깁니다. 토양, 배수성, 고도, 미기후는 포도의 풍미와 구조를 형성합니다. 뉴질랜드 말버러의 소비뇽 블랑은 자갈과 점토 토양, 서늘한 해양성 기후 덕에 열대과일과 풋풋한 풀 향을 띱니다. 반면, 프랑스 루아르 밸리의 소비뇽 블랑은 석회암 토양에서 자라며 시트러스와 미네랄이 강조된 우아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떼루아는 와인에 그 땅의 풍경과 숨결을 담습니다.

빈티지와 떼루아는 서로 얽혀 포도를 와인으로 탈바꿈시키며 각 병마다 고유한 서사를 만듭니다. 같은 포도 품종이라도 언제, 어디서 자랐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와인이 됩니다. 이는 와인이 단순한 맛의 집합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의 기록임을 보여줍니다.


전설이 된 빈티지와 떼루아의 만남

와인의 세계에서 특정 빈티지와 떼루아는 전설로 남습니다. 2005년 프랑스 보르도는 ‘세기의 빈티지’로 불립니다. 따뜻한 여름과 적당한 강우량, 서늘한 가을이 조화를 이루며 까베르네 소비뇽 포도가 최적의 당도와 산도를 띠었습니다. 특히 메독(Médoc) 지역의 자갈과 석회질 토양은 깊은 구조감과 블랙베리, 카시스 향을 가진 와인을 낳았습니다. 이 와인들은 지금도 숙성되며 점점 더 복합적인 풍미를 드러냅니다.

론 밸리의 샤토뇌프 뒤 파프(Châteauneuf-du-Pape) 역시 2005년에 빛났습니다. 뜨겁고 건조한 기후와 붉은 점토, 돌이 많은 토양이 만나 그르나슈 포도 기반 와인에 강렬한 과일 향과 후추의 스파이시한 풍미를 더했습니다. 이 지역의 떼루아는 포도나무뿌리가 깊이 뻗게 해 와인에 독특한 미네랄과 힘을 부여했습니다. 2005년의 이 와인은 그 해의 햇살과 땅의 숨결을 담은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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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시간과 땅의 메아리

와인을 마시는 것은 빈티지와 떼루아가 엮어낸 이야기를 맛보는 과정입니다. 1945년 샤토 무통 로쉴드를 마시면 전쟁의 끝과 새로운 희망을 떠올립니다. 로마네 콩티를 마시면 부르고뉴의 작은 포도밭과 그곳의 바람을 느낍니다. 2005년 메독의 와인을 마시면 자갈밭과 따뜻한 여름을, 샤토뇌프 뒤 파프를 마시면 돌밭과 뜨거운 태양을 상상합니다.

와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 와인은 어디서 왔습니까? 어떤 시간을 품었습니까?” 그 질문에 답을 찾으며 와인의 미스터리를 풀어갑니다. 잔 속에는 그 해의 햇살과 비, 땅의 미네랄과 향기, 농부의 손길과 시간이 빚은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 이 글은 조동천 저 『알수록 더 재미있는 와인의 세계』의 일부 내용을 참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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