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와 단백질, 맛이 건네는 이야기

고기를 재우면 왜 부드러워질까? 마리네이드의 과학

by 보나스토리

보이지 않는 첫인사

주방에서 가장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언제나 산미다.

레몬 한 조각을 고기 위에 올리는 순간, 혹은 와인을 마리네이드에 부어넣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대화가 시작된다. 산이 단백질의 표면에 닿고, 단백질은 그것에 반응한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자 수준에서는 이미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 이 대화는 조용하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명확하다.

산은 단백질의 구조를 완전히 분해하지는 않지만, 접혀 있던 구조를 부분적으로 풀어 성질을 바꾼다. 단백질은 수많은 아미노산이 복잡하게 접혀 있는 분자 덩어리인데, pH가 낮아지면 단백질 내부의 전하 균형이 변하면서 일부 이온 결합과 수소 결합이 약해지고, 그 결과 접혀 있던 구조가 부분적으로 풀린다. 이를 '변성(Denaturation)'이라고 부른다. 열이 단백질을 펼치는 방식과 원리는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단단히 감겨 있던 근육 섬유가 느슨해지고, 씹는 힘에 저항하던 구조물이 허물어진다. 질기던 것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산에 의한 단백질 변성은 pH 2~5 구간에서 일어나는데, 레몬즙의 pH는 약 2~3, 식초는 2~3, 와인은 3~4 수준이다. 마리네이드가 고기에 닿는 순간, 이 숫자들이 분자의 언어로 말을 건다.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16).jpg


불 없이도 익는 것들

남미의 요리 세비체(Ceviche)는 이 원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음식이다.

생선회를 라임즙이나 레몬즙에 재워두면, 구연산이 생선의 단백질을 변성시켜 열을 전혀 가하지 않았는데도 겉보기에 익은 것처럼 하얗게 변한다. 그 기원은 약 2,000년 전, 페루 해안에 살던 모체(Moche)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들이 사용한 것은 라임이 아니었다. '툼보(Tumbo)'라는 열대 패션프루트의 일종에서 얻은 산미 높은 과즙이었다. 라임이 세비체에 들어오게 된 것은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과 함께였다. 지금 우리가 아는 세비체의 형태는 그 이후에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산이 단백질을 변성시킨다는 원리 자체는 라임이 오기 전부터 이미 거기 있었다. 이름도 없었고, 이론도 없었다. 몸으로 먼저 알았다. 어떤 즙에 재우면 생선이 달라진다는 것을. 설명은 훨씬 나중에 왔지만, 요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과일이 고기를 설득하는 방법

산의 방식만이 단백질을 설득하는 길은 아니다.

파인애플, 키위, 파파야. 이 세 과일에는 단백질을 직접 분해하는 효소가 들어 있다. 파인애플의 브로멜라인(Bromelain), 키위의 액티니딘(Actinidin), 파파야의 파파인(Papain). 이 효소들은 단백질 분자의 결합을 끊어내는 분자 가위다. 고기에 파인애플을 갈아 올려두면, 브로멜라인이 근육 섬유의 단백질을 아미노산 단위로 쪼개기 시작한다. 브로멜라인의 연육력은 파파인보다도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다. 두 시간만 두어도 고기의 결이 눈에 띄게 풀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너무 강한 효소는 고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뭉그러뜨린다. 파인애플을 너무 오래 올려두면, 고기가 살결이 아니라 거의 죽처럼 변해버린다. 브로멜라인은 고기 단백질뿐 아니라 입안의 점막도 분해할 만큼 강력한 효소이기 때문이다. 설득이 지나치면 상대를 망가뜨린다. 부드럽게 만들려는 것이 오히려 형태를 허물어버리는 일. 관계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다.

한국인이 오랫동안 즐겨온 갈비 양념의 배와 양파도 같은 원리를 품고 있다. 배에는 프로테아제 계열의 효소가 있어 고기를 연하게 한다. 단백질을 설득하는 방법도 하나가 아니다. 파인애플처럼 빠르고 강하게, 혹은 배처럼 천천히 은근하게. 어느 방법이 맞는가는 고기의 성질과 요리의 목적에 달려 있다.

통조림 파인애플이 연육 효과가 없는 것도 기억해 둘 만하다. 가열 살균 과정에서 브로멜라인 효소의 구조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열은 단백질만 변성시키는 게 아니다. 때로는 변화를 일으키는 힘 자체를 먼저 제거하기도 한다.


산이 지닌 두 얼굴

그런데 산이 항상 고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산성 마리네이드의 효과는 농도와 시간과 고기의 결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산이 과하거나 재우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고기 표면의 단백질이 오히려 과도하게 변성되면서 질척해지거나 퍼석해질 수 있다. 특히 닭고기처럼 섬세한 육질에 강한 산성 마리네이드를 오래 사용하면 겉감이 무너지기 쉽다. 마리네이드 위키백과도 "산이 너무 많이 첨가되면 최종 음식물에 악영향이 될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부드러움을 원했는데, 오래 두었더니 형태가 망가지는 아이러니. 세심함이 필요하다. 얼마만큼 닿게 할 것인가, 얼마나 오래 대화를 이어갈 것인가. 그 균형이 결과를 결정한다.

소금은 삼투압 원리로 고기 표면으로 수분을 끌어낸 뒤, 그 수분에 녹아 서서히 근육 조직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고기에 소금을 뿌린 후 약 10~15분이 지나면 표면에 수분이 맺히고, 40분 이상이 경과하면 그 수분이 다시 고기 속으로 재흡수된다. 이 때문에 스테이크 조리에서는 최소 45분 이상 미리 소금을 뿌려두거나 아니면 굽기 직전에 뿌리는 것이 권장된다. 그 사이에 구우면 표면의 수분이 마이야르 반응을 방해한다. 산은 표면에서 인사를 나누고, 소금은 속으로 들어가 고기와 깊이 섞인다. 같은 마리네이드 안에서도 성분마다 나누는 대화의 방식이 다르다.


양념이 고기를 설득하는 시간

우리는 흔히 마리네이드를 '재운다'라고 말한다.

재운다는 표현이 좋다. 억지로 밀어 넣거나 강제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고기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산과 효소와 소금이 각자의 방식으로 고기에 접근하고, 고기는 그것들을 서서히 받아들인다. 재우는 시간이 짧으면 표면만 변하고, 충분히 재우면 안까지 바뀐다. 그러나 너무 오래 재우면 고기는 형태를 잃는다. 적당한 시간, 적당한 농도, 적당한 압력. 모든 좋은 관계가 그렇듯이, 지나침은 부족함만큼 해롭다.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은 저서 『요리를 욕망하다(Cooked)』에서 요리와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요리는 우리를 “사회적·생태학적 관계, 즉 동식물과 흙, 농부, 우리 몸 안팎의 미생물, 그리고 요리로부터 양분과 기쁨을 얻는 사람들과의 그물망 속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다.

산이 단백질을 변성시키는 것은 자연의 일이다. 이를 레몬즙, 식초, 갈아 넣은 파인애플로 다루어 원하는 맛을 만들어내는 것은 문화의 행위다. 우리는 자연이 하는 일을 이해하고, 그것을 요리라는 언어로 번역해왔다.


불판 위에서 완성되는 대화

불판에 오른 고기는 모든 대화의 결과를 드러낸다.

산에 절여진 고기는 표면 단백질의 구조가 변해 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지만, 마이야르 반응 속도는 수분, 온도, pH 등 여러 조건에 의해 함께 결정된다. 겉이 빠르게 굳으며 향이 선명하게 피어오른다. 단백질이 변성된 표면은 열에 더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산이 만들어둔 구조의 변화가 불 앞에서 완성된다.

갈비를 재운 다음 날 불판 위에서 익는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면, 그 향이 보통 고기와 다르다는 것을 안다. 배와 양파와 간장과 마늘이 섞인 향이 아니라, 그것들이 고기와 하나가 되어 만들어낸 전혀 다른 무언가. 산미는 고기를 열기 위한 열쇠였고, 열이 그 안으로 들어가 꽃을 피운 것이다.

산이 말을 걸고, 단백질이 반응하고, 시간이 그 결과를 익혀낸다. 불판 위에서 완성되는 그 한 점에는, 재우는 동안 일어났던 조용한 대화들이 모두 담겨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맛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산미와 단백질이 나눈 오랜 대화의 결말이다.



참고 서적《숙성의 미학과 연육의 언어로 말하다》조동천 저
























매거진의 이전글고기마다 결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