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30분 어김없이 전화가 온다. 셔니는 하교할 때마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며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가장 주요한 일을 전화로 전달한다. 친구들과 같이 하교하는 날이면 시끌시끌한 고음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낭창하게 들리다 30초 만에 끊기기도 하고 이따금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재잘재잘 말을 해 전화를 끊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오늘은 학교에서 팝스(PAPS 학생건강체력평가)를 했다며 옆구리도 아프고 어디도 아프다며 앓는 소리를 한참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학원에 가기 싫다며 우는 소리를 한다. 이럴 땐 집에 와서 얘기하자며 얼른 전화를 끊어야 한다. 일단 왜 학원에 가기 싫은지 생각해 본다. 비가 오는 날씨 때문일까, 체력 테스트로 몸이 힘든 것일까, 영어 시험 때문일까.
역시나 집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울먹거린다. 셔니는 팝스 때문에 몸이 아프다면서도 가방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문다. 나는 엄마 손이 약손이라며 셔니의 옆구리를 주물러 주는데 셔니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로 버티고 있다. 평정심을 잃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다. 최대한 다정하면서도 심심한 말투로 하나씩 물어야 한다.
“영어 단어 시험 때문에 그래?”
셔니는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단어장을 들고 울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학원에 가기 싫다고 하는 건 학원에서 치를 테스트 때문이다. 이럴 땐 방에서 단어를 외우든 핸드폰을 보든 그냥 두어야 한다. 내가 타일러도 화를 내도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을 공허한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 시간엔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묵묵히 한다. 오늘은 김소영 작가의 <어떤 어른>을 읽고 있었다. 하필 어린이에 대한 책이어서 내 마음은 이미 태평양 바다가 되었다. 어린이의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작가가 되어 나도 관대하고 좋은 어른으로 분해 있었다. 당장 내 눈앞에 어떤 말썽을 부리는 아이가 있어도 다 받아주고 어르고 달랠 수 있는 인내심과 관용을 한가득 충전해 놓고 있는 때였다. 나도 열두 살엔 학원에 가기 싫을 때가 있었고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셔니도 그럴 것이다.
책을 묵독하며 어린이 시절의 나와 열두 살 셔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그려졌다. 그 순간 “오도독” 사탕 으깨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울었냐는 듯 맛있게 사탕을 먹고 있을 셔니 모습이 떠올라 갑자기 웃음이 났다. 나는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걸어가 셔니가 방문에 붙여 놓은 메모지에 짧은 글을 썼다.
오도독 오도독
사탕 깨는 소리
창 밖의 청설모
우리 집에 들어왔나
작고 귀여운 소리에
입꼬리 자꾸 올라가네
그때 셔니는 쓱싹거리는 볼펜 소리에 인기척을 냈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볼펜을 숨기며 과장된 연기를 했다. 셔니는 내가 쓴 메모를 보고도 안 본 척 응수하더니 톡 떼어내 읽음 표시를 했다. 분명 셔니 입꼬리에도 무지개가 걸렸을 거다. 셔니는 단어장을 가져오더니 하나씩 불러달라며 셀프 테스트를 시작했다. 스무 개 단어 중 한 개만 빼고 다 맞혔다. 셔니는 학원 가방에 단어장을 넣더니 쿨하게 집을 나선다.
“엄마, 버스에서 단어장은 안 봐도 되겠지?”
어린이의 마음은 한여름 날씨처럼 변화무쌍하다. 폭풍 같은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쩍쩍 번개가 치다가 해가 쨍쨍 나기도 한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마음엔 그 어떤 감정도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투명하고 맑은 입체 도화지다. 이 작고 귀여운 생명체에게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잠시 고민해 본다. 엄마이기 이전에 딸이 본받고 싶은 멋진 어른이 되고 싶어서. <어떤 어른>을 읽고 좋은 어른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