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때마다 변하는 걸 햇빛의 조도와 습도, 기온만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시골에서 텃밭을 일구는 부모님이 철마다 보내주는 꾸러미에 가을, 여름, 봄이 가득 실려 온다. 가을에는 갓 수확한 단감과 밤, 고구마를 세 가족이 먹기에도 넘칠 만큼 박스에 담아 보내주고 초여름에는 보리와 감자, 옥수수, 앙증맞은 크기의 수박과 토마토가 어깨동무하고 집에 온다. 봄에는 나물이 제철이라 냉이와 두릅, 쑥과 산마늘 그리고 미나리가 문을 두드린다.
이번 봄에도 어김없이 엄마 아빠의 선물이 종이 박스에 꾹꾹 담겨 집에 왔다. 1박 2일이 걸리는 배송 시간에 나물이 바짝 마를까 걱정이 되었나 보다. 두껍고 커다란 박스 안에는 서로 겹치지 않게 가지런히 놓인 두릅이 신문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밑동엔 자주색이 감도는 이파리가 수분을 머금은 채 한층 가뜬해 보였다. 다보탑, 석가탑을 이렇게 정성껏 쌓았을까. 자식들을 생각하며 투실투실한 두릅으로 3층 탑을 쌓아 만든 손길이 눈에 어른거려 마음이 몽글해졌다. 이번엔 신문지에 돌돌 싼 미나리도 있다. 찬조 출연이지만 존재감은 두릅 못지않다. 유독 실처럼 가는 줄기를 이렇게 두툼하게 수확하려면 꽤 오래 무릎을 꿇었을 거다. 줄기가 짧고 잎이 많은 돌미나리는 야생에서 주로 자라는데 겁이 많은 우리 엄마는 미나리를 좋아하는 거머리를 발견하고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비닐봉지에는 어린 쑥으로 만든 별미, 쑥떡도 있었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게 신통치 않았던 엄마는 얼마 전 떡을 만든다며 찹쌀가루를 대신 주문해 달라고 하더니 직접 만든 쑥떡까지 보냈다. 흰 떡보다 쑥이 배는 더 많아 쑥떡이 아니라 “떡쑥”이라고 불러야겠다. 향긋한 쑥 냄새가 아직 남아 있는 걸 보니 엄마는 갓 지어 만든 떡을 한 김 식혀 바로 포장했으리라.
검고 굵은 머리엔 흰 눈이 내려앉은 지 오래, 얼굴과 손등엔 나무의 나이테 같은 주름이 가득해 누가 봐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건만 성인이 된 자식이 상전이라도 되는 양 철마다 진상품을 올려 보낸다. 직접 수확한 고추를 햇볕에 말려 만든 고춧가루, 들기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대파와 양파 같은 필수 식자재까지 엄마 아빠의 정성 덕분에 마음껏 얻어먹는다. 이따금 아빠의 도전 의식이 사기충천하면 새로운 작물도 맛볼 수 있다. 작년엔 땅콩도 먹었고 무화과, 사과대추도 먹어봤다. 서울에 올라올 때면 1인 가구 이삿짐만큼 각종 장아찌와 농산물을 잔뜩 가져오는 게 못마땅하기도 했다. 밥만 먹고사는 것도 아닌데 세 식구가 먹고도 남는 양이어서 마냥 썩히는 게 죄스러웠다. 물론 이럴 때 인심 좋은 이웃이 되어 주위에 나눠 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지난겨울엔 아빠의 왼쪽 어깨에 통증이 생겨 조마조마했다. 농사는 그만 지으라고, 조금이라도 줄여보라고 했지만 아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올봄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다니면서도 이것저것 모종을 사서 밭에 심는다. 우리 딸들 제철 음식을 먹으라고. 먹고 건강하라고.
엄마 아빠가 보내준 식재료를 정리하고 났더니 개미 한 마리가 왼쪽 팔에서 어깨 쪽으로 기어오르는 게 보였다. 아파트에서 개미를 볼 일은 정말 없다. 순간 거실에 있던 종이 박스가 눈에 띄었다. 강릉에서 서울까지 두릅 박스를 타고 왔을 걸 상상하니 싱긋해졌다. 택배차가 이동할 때마다 어디쯤 왔는지 시시각각 장소도 확인하고 혹시 모를 두릅 무리의 야반도주를 감시하느라 잠 못 이루었을지도. 엄마 아빠의 하명을 받아 무사히 공물을 전달했으니 개미 현감의 임무는 다한 셈이다. 나는 개미를 치하하며 아파트 밖으로 나가 금방 지렁이가 지나간 것 같은 촉촉한 땅에 놓아주었다.
푸릇한 봄 선물을 받고 나니 벌써 여름이 기대된다. 딸은 다 도둑인가 보다. 그래도 이번엔 정말 보내지 말라고, 자식보다 엄마 아빠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단단히 말씀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