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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연

by 체리봉봉

여러 해 전 동화 창작 수업을 들었다. 당시 우리 딸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네 살 꼬마 아가씨였고 그녀가 기관에 등원한 낮 시간을 활용해 창작 활동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현업에 있는 동화 작가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동화 창작에 뜻이 있는 성인 여성들과 소규모 그룹 수업을 듣게 됐다.



매주 한 번씩 만나 숙제로 써 온 단편 동화에 대해 돌아가며 합평하는 수업이었다. 마무리는 작가 선생님의 코멘트로 영양가 있게 진행됐다. 내향적인 성향이라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동화라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기에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었다. 집에서 아이만 돌보던 엄마가 다시 만난 문 밖의 세계는 참 신선하고 따뜻했다.



동화 수업 첫날, 두리번거리며 낯선 환경을 탐색하던 나는 카페 스터디 룸에 들어오던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투명 반사판이라도 있던 건지 유독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 눈 부셨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았고 그녀도 내 딸보다 한 살 어린 딸을 키우고 있었다. 게다가 같은 아파트 단지, 다른 동에 살았다. 중국 칭화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그녀는 중국어 강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중국 작가가 쓴 그림책을 번역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창작 수업을 들으러 왔다고 했다.



예쁘장한 외모만이 아니라 상냥하고 친절한 말씨, 남에 대해 험담할 줄 모르는 고운 심성도 좋았다. 우리는 매주 만나 수업도 듣고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나와 비슷한 관심사와 취향을 가진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기적과도 같다. 주객이 전도된 듯 하지만 동화 창작 대신 친구 한 명을 얻은 수업이었다. 동화 수업은 3개월로 끝이 났지만 우리의 만남은 9년째 이어지고 있으니까. 중간에 내가 이사하는 바람에 이전보다 만남이 뜸해졌지만 여전히 서로 안부를 묻고 1년에 한두 번씩 얼굴을 마주한다.



작년 가을에 만났던 그녀를 엊그제 만났다. 서로의 근황과 그간 있었던 이벤트가 될 만한 일을 기승전결로 듣고 감정과 생각을 나누었다. 물론 비슷한 또래인 아이들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 주제다. 말수가 적은 나는 늘 화자보다 청자의 자리에 머물며 그녀의 이야기를 흡수하듯 빼놓지 않고 경청한다. 내가 적극적으로 입을 열 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를 만났을 때다. 그녀가 들려주는 중국 이야기는 늘 흥미롭다. 작년 가족들과 타이베이 여행을 할 때 양안갈등이 고조되는 바람에 보통화를 구사하는 그녀가 되레 불친절을 경험한 이야기.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짚다가 베이징과 상하이의 지역 갈등까지 나아갔다. 나의 끝없는 질문 세례에도 그녀는 한결같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도 분명 좋은 선생님인 게 틀림없다.



화상 수업으로 영어회화에도 열심인 그녀에게 영어와 중국어에 대해서도 물었다. 영어는 명사 중심, 중국어는 보어 중심, 우리말은 동사 중심이라며 쉽고 명쾌하게 말해준다. 우리의 대화 소재는 언어에서 가지치기해 만다린어의 유래에 대해 얘기하다가 타이베이와 마라탕, 더 나아가 동파육까지 이르렀다.



당송 팔대가의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던 북송 시대의 소동파는 정치인이자 학자이기도 하지만 요리 실력도 뛰어난 천재였다고 한다. 그는 항저우 관리로 임명됐는데 아열대 기후의 물의 도시답게 때마다 홍수가 나서 사람들은 큰 수난을 겪었다. 소동파는 사람들에게 강둑을 쌓으라는 아이디어를 냈고 이후 물로 인한 피해가 줄어들었다고.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하며 돼지를 선물했고 소동파는 자신만의 요리 레시피로 동파육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답례했다고 한다.



이제 동파육을 먹을 때마다 소동파도 생각나고 그녀도 생각날 것이다. 동파육의 유래까지 알려주는 친구가 있어서 인생이 참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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