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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좋아서

유동룡 미술관과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

by 체리봉봉

긴 연휴를 맞아 아주 오랜만에 제주에 갔다. 6년 만이었다. 떠나는 날 아침부터 제주엔 강풍이 불었고 김포로 회항하거나 지연되는 비행기가 많았다. 역시 제주는 바람의 섬이다. 바다의 습기를 잔뜩 머금고 태어나 요란뻑적지근하게 바람이 몰아치는 곳. 나는 설문대 할망의 입도 허락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공항을 걸었다. 다행히 오후시간부터 바람이 잦아들어 모든 비행기들이 차례로 제주 공항에 내렸다.



제주 어디에서나 보이는 한라산은 안개에 가려 더없이 신령스럽게 보였고 잔뜩 찌푸린 날씨는 들뜬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화산섬이라는 독특한 지형과 생태는 육지에서 보는 풍경과 전혀 달랐다. 뜨거운 마그마가 지표를 뚫고 흘러넘친 길을 따라 용암석이 피어나고 분출된 화산재는 빠르게 식어 크고 작은 오름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중산간지대에 올라 보면 한라산 주변으로 동그랗게 솟은 동산 같은 오름이 작은 파도 물결처럼 부드럽게 이어진다. 한 폭의 파노라마는 저 멀리 내다보이는 바다에서 종결되고 목탄으로 드로잉 한 듯 하늘과 맞닿은 경계가 흐릿하다. 저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며 예이츠의 이니스프리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바다 한가운데 홀로 선 듯 진한 고독도 느껴본다. 산과 바다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언제 와도 새롭다.



제주 땅 한가운데 솟아올라 듬직하게 앉아 있는 한라산은 하늘의 북극성 같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며 방위를 찾는 기준이 되었던 별처럼 제주 어디에서나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라산 백록담에 고여 있는 물은 주역의 택산함 괘 같다. 잔잔한 호수는 성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길상과 같은데 하늘과 가까운 높은 산 위의 물이라 더욱 신성하다. 완만한 산세와 여요한 한라산은 제주 사람들의 의지처가 되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이따금 제주를 오가는 나 같은 방문객들도 장엄한 한라산에 기대어 한숨 내려놓고 유유자적 여유를 즐긴다.



종려나무와 담팔수, 꽝광나무는 제주에서 처음 본 식물들이다. 기후와 토질에 맞게 자라는 식물은 그 지역의 특성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바로미터다. 꼿꼿해 보이는 나무가 얼마나 유연하게 자라는지는 제주의 편향수를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구좌읍에 있는 팽나무 편향수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가지를 쭉 뻗어 그 자체로 작품 같다. 고난과 시련에 꺾이지 않으려면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듯 제주에 자생하는 식물들은 이미 그 진리를 깨친 것 같다.



어디를 가든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활용한 정원과 건축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심신을 조화롭게 해 주었다. 나 말고도 이미 제주에 매료된 예술가와 건축가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창작활동을 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준 제주에 멋진 작품을 헌납했다.


제주에 갈 때마다 이중섭, 안도 다다오, 이왈종, 김영갑 같은 예술가들의 족적을 찾아가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이번에는 유동룡 미술관과 김창열 미술관에 들렀다. 유동룡이라는 이름 석자보다 이타미 준이라는 예명으로 더 익숙한 바로 그 건축가다. 그의 예술 작품 같은 건축물에는 주변 지형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동양 건축의 정신이 녹아있다.



일전에는 이타미 준이 건축한 포도 호텔에서 큰맘 먹고 숙박을 한 적이 있다. 일부러 건축 투어 가이드까지 신청해 호텔 곳곳을 감상했다. 바깥 전망대에서 호텔을 보면 작은 오름들이 아롱다롱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포도송이 같다. 내부는 과거 어느 마을에 입장한 듯 골목 같은 작은 통로에 객실이 드문드문 이웃해 있었다. 화산석 같은 검은 바닥과 창문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창문 상단은 한옥 창문처럼 문살에 한지를 발라 전통의 미를 보여주고 하단은 투명한 유리창으로 정원을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방 쪽에 창호지를 바르고 일본에선 방 바깥쪽으로 창호지를 바르는데 재일동포인 이타미 준은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창문을 만들었다. 건물 내부 조명은 최소화하고 복도 천장에 둥글게 창을 만들어 햇빛 별빛이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은은하게, 깊게 파고드는 빛이 안과 밖, 열림과 닫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건축 자재도 제주에서 나는 것들을 십분 활용해 인공적이지만 인공적이지 않은 흡사 자연물 같았다. 목재로 보이던 갈색 벽도 감물로 염색한 천을 덧입혔을 정도다. 참고로 감물로 염색한 옷은 자외선 차단, 방수, 항균, 통풍 기능이 있어 제주 사람들이 즐겨 입었다. 요즘 시판되는 아웃도어룩의 기능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소재다. 게다가 내구성도 뛰어나 잦은 빨래에도 기능이 줄지 않는다고 한다.


제주의 것을 조화롭게 녹여낸 건축물을 둘러보며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나는 한 건축가의 정신과 예술 속에서 제주를 오롯이 느꼈었다.



이번에는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있는 유동룡 미술관을 방문했다. <미묘하게 열린 어둠 안에서: 이타미 준> 전시가 있었다. 인포데스크에서 이어폰을 하나씩 받아 들고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이타미 준의 건축 세계를 차례로 들여다봤다. 재일 한국인이자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삶이 그에게 미친 미의식이 무엇이었을까. 그 양극 같은 세계를 초월한 이타미 준의 대표 건축과 회화 작품이 입체와 평면으로 고르게 전시됐다. 한 인간을 완벽에 가깝게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언어와 철학을 꼭 알아야 한다. 빛과 어둠, 있음과 없음, 긍정과 부정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체성을 표현했던 한 건축가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관람 후 제공되는 제주 녹차는 이타미 준의 집을 방문한 손님들을 위해 그가 준비한 따뜻한 선물 같았다. 나는 씁쓸하고도 구수한 차를 마시며 창 밖의 제주 풍경을 넋 놓고 감상했다. 사색의 시간도 선물 받은 셈이다.



유동룡 미술관과 근거리에 있는 김창열 미술관도 결코 빠트릴 수 없다.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어느 5성급 호텔에서였다. 한쪽 벽면을 고스란히 차지한 대형 사이즈에 빗방울이 캔버스에 떨어져 흐르는 것 같은 율동감이 느껴졌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평면 그림이라는 걸 확인한 후 감탄사를 터트렸다. 강렬했던 이미지였던 터라 이따금 전시장에서 만나는 그의 작품이 참 반가웠었다. 김창열 작가의 작품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미술관이 제주에 있으니 꼭 들러야 했다.



이북 출신으로 한국전쟁을 겪으며 참상을 목도한 작가는 제주도에 내려와 그림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승화시키고자 했다. 그에게 물방울은 견딜 수 없는 고통, 큰 상실을 씻어 내리는 정화수였다.

캔버스, 마포, 천자문 위에 흐르는 빗방울은 작가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궁극에는 그의 철학인 “회귀”로 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태어난 자리로 돌아가는 것, 불교의 공空, 도교의 무無가 그에게 물방울인 것이다.



평소 흥미로운 주변 인물의 생일을 만세력으로 돌려보곤 하는데 외람되지만 고인이 된 작가의 생일도 찾아보았다. 음력으로도 양력으로도 그는 계수癸水 일간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 작가가 곧 빗방울이고 빗방울이 곧 작가였다. 그는 천명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와 천품을 다하고 갔다. 물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세상을 깨끗하게 만든다. 작가가 남긴 빗방울 시리즈는 동양 사상을 상기시키며 감상자의 마음도 정화해 준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림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곧 명상이니까.



제주에 머무는 3박 4일 동안 모든 날씨를 경험했다. 구름이 잔뜩 깔려 흐렸던 날,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날, 강풍이 불던 날, 맑고 투명한 봄 햇살을 만끽한 날이었다. 설문대 할망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날씨로 제주 방문을 축복했다.



대자연이 주는 기쁨을 누리려면 제주로 가야 한다. 1만 8천의 신들이 돌보는 그곳은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이니스프리다. 제주가 우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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