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은 언제나처럼 설렌다
2년 정도 다닌 회사를 때려쳤다. 연봉이며 복지며 뭐 하나 꿀릴 게 없는 회사를 제 발로 뛰쳐나온 데에는 밤을 새우며 이야기해도 모자랄 오만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퇴사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행복한 삶에 대한 갈증과 죽기 전에 한번쯤은 해 보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해 보고 싶은 일이 바로 책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작가가 되는 것이었고.
퇴사를 앞두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 지인들에게 내 결정과 이후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지. 한번 해봐." 또는 "와, 부럽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거 자체가. 되게 멋지기도 하고." 말리는 이는 없었다. '그토록 힘들게 들어간 회사를 왜 나오냐'라든지, '요즘 취업시장이 어떤데, 게다가 코로나 시국에 무슨 퇴사야'라고 말하는 이 역시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내 도전을 응원해주었고, 심지어는 축복해주기까지 했다.
물론, 아무 밑천 없이 회사를 나온 건 아니었다. 사업을 하려거든 자본금과 사업 아이템이 필요하듯, 책쓰기에도 필요한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필력이라고까지는 보기 어렵지만) 글을 쓸 줄 아는 능력, 다른 하나는 글의 소재.
글을 배우고 써 온 시간만 해도 거의 20년. 게다가 글쓰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교내 백일장이나 독후감 대회에서 곧잘 상을 타왔고, 중학교 시절에는 SNS의 조상격인 '싸이월드'를 주무대로 매일 같이 감성 다이어리를 쓰곤 했다.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이어리를 올린 다음날, 학교에선 내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관한 이야기가 그날의 화두가 되었고 재밌었다는 친구들의 칭찬에 머쓱해지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주입식 교육과 대학 입시 준비로 글을 자주 쓰진 못했지만, 이따금씩 쓰는 일기로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대학 입학 후 처음 맞이한 논술형 시험은 내게 글쓰기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고 나의 글쓰기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한 학기 동안 공부한 수많은 학습 내용을 한 문단 한 문단씩 담아내고, 나만의 글투로 바꿔내는 일은 마치 마법처럼 느껴졌다. 시험 공부는 언제나 고통스러웠지만 시험지에 내 생각과 내 문체를 소중하게 담아낸 후엔 알 수 없는 즐거움과 보람으로 가득찼다.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고.
또, 군 복무 시절엔 '소나기(소중한 나의 병영일기)'를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써서 포상휴가와 표창을 받기도 했으며, 회사 다니면서는 블로그를 통해 내 감정과 생각의 단편들을 글로 옮겨 적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글쓰기와 관련된 나의 기억은 모두 좋은 기억들로만 가득했다. 글을 쓸 줄 아는 능력이 아예 없진 않고 내 곁엔 언제나 글쓰기가 있었으니, 나머지는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글의 소재는 멀리서 찾지 않기로, 애초부터 마음 먹었다. 책을 쓴다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나와 동떨어진 또는 무겁고 어려운 소재를 다루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더욱이, 평범한 개인이 쓴 에세이가 요즘의 출판 흐름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해선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던 직장생활과 그 마침표였던 퇴사를 최우선 소재로 삼기로 한 것. 퇴사 말고도 다른 이야깃거리가 많긴 했지만, 시기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소재였으니 말이다. 이에 더해, 퇴사를 내 첫 책의 소재로 하자는 생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블로그였다.
직장에 다니면서 어떤 이유에선가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블로그에 취업준비 팁이라든지 맛집/카페 리뷰 따위를 올렸는데, 시간이 갈수록 일의 기쁨과 슬픔, 불안한 청춘의 감정·생각, 퇴사에 대한 고민을 쓰는 일이 잦아졌다. 그 어떤 여과 없이 솔직하고 담담하게 내뱉는 글투와, 때로는 슬픔과 우울에 가득 젖은 글에 나름 좋은 반응을 얻었고, 몇몇 이웃분들께서는 '너무 재미있어요. 책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요'라는 댓글을 달아주시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분들의 댓글이 나를 책쓰기 도전으로 이끌었던 걸 수도. 어쨌든 글의 소재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글을 쓸 줄 아는 능력과 글의 소재라는 밑천이 마련되었으니 더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책쓰기에 도전한 것이다. 시작은 언제나처럼 설렌다. 책쓰기를 도전하기로 마음 먹은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고, 작가님이라고 불리며, 운이 좋다면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에 내 책이 올라가 있는, 그러한 장밋빛 미래를 꿈꾸면서까지. 그런 설레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책쓰기를 시작했다. 앞으로 내 도전을 가로막을 벽과 어쩌면 보이지 않을 이 길의 끝을 예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