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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Jan 24. 2017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 이유

SNS,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갉아먹다.


2017년 1월 28일부터 30일까지 카카오채널에 이 글이 게시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에 빠지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작년 12월 말쯤이었다. 페이스북 계정을 완전히 삭제하기로 결심한 것이 말이다. 사실 그전부터 삭제를 하기 위해 비활성화는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 기간이 오래가지 않았다. 수년간 페이스북을 이용하면서 그곳에 이미 강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끔씩 한 번씩 들어가는 건 괜찮지 않을까라는 가벼운 마음이 더욱더 빠져들게 만들었다. 페이스북 중독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래도 좀 끊어보자는 결심에 비활성화를 하다가도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창을 띄워놓고 있으면 키보드 위에 얹어진 왼손 검지 손가락이 습관처럼 f를 누르고 있어 자동완성 기능으로 엔터만 누르면 바로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게 날 인도하고 있었다.


페이스북을 처음 접했을 때를 떠올려봤다. 2009년 여름, 입대하기 전 그 당시는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이었다. 싸이월드가 우리의 온라인 공간을 장악하고 있을 때 나는 군 입대를 했고, 그곳을 통해 친구들과 소통을 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전역을 몇 개월 앞둔 시점에 오랜만에 들어가 본 싸이월드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친구들의 미니홈피에는 페이스북으로 옮긴다는 글을 끝으로 더 이상 싸이월드 내에서 그들의 소식은 볼 수 없었다. 싸이월드를 사용하는 친구들이 몇 남지 않았기에 나도 한번 시험 삼아 페이스북을 사용해볼까 했던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페이스북에 열정을 쏟다

분명 순기능도 많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사를 간 탓에 연락이 끊긴 초등학교 친구들과 오랜 기간 연락하지 않아서 안부가 궁금하기도 한 중고등학교 친구들, 그리고 잘 알진 못하지만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한 친구들. 그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가끔 길가다가 마주친다면 모를까. (물론 만나도 예전 같지는 않더라.)


 싸이월드는 대개 폐쇄성이 짙었다. 그래서 위에 열거해둔 친구들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일촌신청'이라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이와 달리 대부분 쉽게 그들의 소식을 염탐(?)할 수 있었다. 이 친구가 어딜 다녀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친구들과 어울리는지 묻지 않아도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상을 게시해주었고 굳이 그 친구들을 찾아 나서지 않더라도 친구 추천 목록에는 그들이 있었다.


그렇게 연락이 끊긴 친구들과 다시 연락이 가능해졌고 많은 친구들의 일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페이스북으로 넘어온 상황에서 싸이월드를 고집하던 친구들도 마지못해 넘어오곤 했다. 나 또한 그 '대부분'에 속해 열심히 '자랑'이라는 명분보다 친구들과 '공유'한다는 합리 화적 명분으로 페이스북에 열심히 게시 글을 올리기도 하고 친구들 글을 읽고 다니기도 했다.  

역기능,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갉아먹다

그런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루에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을 끊임없이 페이스북에 접속하는 것이다. 직접 횟수를 세어보지 않았지만 만약 페이스북에서 하루 접속기록을 제공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하리라. 하지만 페이스북은 절대 그런 서비스를 제공할 리가 없다. 끊임없이 접속할 때도 딱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어떤 친구가 게시 글을 올렸나, 어딜 다녀왔나 또는 무엇을 먹었나를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잦은 접속은 머지않아 나에게 부작용을 안겨주었다. 그런 행동은 내게 행복을 주지 않는 짓임을 알았음에도 꾸준히 갉아먹는 짓을 나 자신에게 가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에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 즉 결핍에 의한 부분이 컸다.


그렇게 몇 년 간 그곳에 푹 빠져있는 동안에 "행복"이라는 감정은 절대적인 판단에서 상대적인 판단으로 조용히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밥을 먹거나, 공연을 보거나, 여행을 가는 등의 행동들은 그것들을 온전히 그 자체로 즐기기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할 것 없는 내 잔잔한 일상을 화려한 연극으로 바꾸려는 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문제로만 단정 짓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실토했다. 생각을 공유해보니 개인의 고민이 아닌 우리의 고민이었던 것이다.


 어떤 친구는 나를 바라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나는 또 어떤 친구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위해 우리는 암묵적으로 더 열심히 더 멋있게 사는 것처럼 일상을 좀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꾸밀수록 부러움을 느끼는 대상의 상대적 박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기껏해야 학교, 도서관, 가끔 술 한 잔, 학원 등등의 단순한 내 일상이 패밀리 레스토랑, 놀이공원, 해외여행 등등 특별한 그들의 일상과 차이가 나더라도 너무 차이가 났다. 그런 모습을 보면 볼수록 열등감은 커져만 갔고, 상대적 박탈감도 뒤따라왔다.  


 그들 인생의 하이라이트 씬과 내 인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비교한다는 것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이다.


성격도 고약해졌다. 이 곳 저곳 달린 답글들을 찾아다니면서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가? 저 친구들은 그냥 '부럽다' '좋겠다'라는 감정에서 끝나는 건가? 그래서 좋아요. 버튼도 막 눌러줄 수 있구나. 내가 그 버튼을 한번 눌러주기에는 장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눌렀던 좋아요(또는 남겼던 답글)가 나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걸 알아차린 후 쟤는 왜 안 남겨?라는 생각은 나 자신을 심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나 자신이 쪼잔한 거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미 내겐 보상심리가 작동했던 것이다.   


내 잔잔한 삶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떨쳐내고 싶었다. 아니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떨쳐내야만 했다. 그래서 가끔씩 비활성화하면서 떨쳐내기 위해 발악해봤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남들은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도태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오랜 기간 내 머릿속에 박혀있었다.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한 듯 페이스북은 점점 변질했다. 타임라인에는 친구들의 좋아요를 통해서 유입된 저품질의 게시글들만 난무했다. 이제 친구들 게시 글에서만 느꼈던 괴리감이 그들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헤비유저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유튜브, 페이지, 그룹 등등 괴리감이 흘러오는 콘텐츠들은 다양했고 그럴수록 점점 페이스북의 순기능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생각을 바꾸다


 큰 결심을 했다. 페이스북을 끊기로 했다. 기존에 비활성화했던 마음가짐과는 확연히 달랐다.  발악을 넘어서 더 이상 그곳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페이스북 아이디를 만드는데 2분이 채 안 걸리지만, 삭제까지는 2주 넘는 시간이 걸린다. 2주 동안 참 괴로웠다. 가끔 술이라도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f를 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들어가는 순간 비활성화는 풀리고 다시 삭제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2주를 기다려야 한다. 다행히 2주를 참았고 페이스북을 내 일상에서 떨쳐냈다. 친구들이 없어지는 건 아닌지, 나만 도태되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런 상황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동안 올린 자료가 아까워서, 그래도 계정은 남겨두고 안 하면 되지 않을까. 계정을 삭제할 때까지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았었다.  그런데 그동안의 흔적이 아닌 앞으로의 삶을 위해서는 확실한 판단을 내렸어야 했다. 물론 그동안 올렸던 글, 댓글, 사진, 정보 등 모든 자료들이 아깝긴 했지만 그보다 그곳에 투자한 내 지나간 시간과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당하느라 고생했던 마음이 더 안타까웠다.   


 사실 페이스북 내에서의 친구들은 그저 보여주기 식의 필요에 의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필요에 의해서 얽힌 관계는, 그 필요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멀어지기 마련이다. 정말 그랬다. '친구'라는 가면을 쓴 그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오히려 친구들이 없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서가 아닌 전화 또는 카톡으로 연락해오는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탈퇴하고 한 달이 지난 시점, 내 생일이었다. 페이스북을 했었다면 생일 알람을 통해 수 십 명의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글을 남겼을 테지만, 기껏해야 2~3명 정도의 친구들만 문자나 카톡으로 축하한다고 보내왔었다. 누구든 많은 친구들에게 축하를 받길 원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형식적인 행동에 불과하다면 그 친구들은 내 곁에서 금방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든 내 곁에 머무르게 하려고 노력해도 금방 흘러간다. 어차피 흘러가는 것들에 힘을 쓰느라 소중한 일상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그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는 내 삶의 생활양식을 소유에 맞출 것이냐, 존재에 맞출 것이냐에 따라 삶의 가치는 180도 변화한다고 말한다. 돈, 물건, 사람 어떤 무엇이든지 내 소유로 두기 위해 괜한 힘을 쓰거나 또는 평생 곁에 있을 거 같던 것들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존재 자체에 감사하던지. 물론 어떤 생활양식이 옳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존재'를 택한다면 는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다.

 

 지금 페이스북 아이디가 없는 건 아니다. 가끔 정보를 받기 위한 용도일 뿐 더 이상 전과 같이 사용하지는 않는다. 5개월 넘게 하지 않고 있으니 굉장히 편하다. 더 이상 친구들에게 내가 까먹고 있던 내 일상을 안 들어도 되고, 또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니 말이다.  

가면을 벗고 내면 들여다보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넓히기 위해 가면을 쓰곤 한다. 하지만 가면을 쓰고 사람을 만난다는 건, '나' 본연의 태생적 찌질함을 숨기고 멋진 사람으로서 상대를 대해야 하므로 참 힘든 일이다. 페이스북 내에서 본연의 찌질함을 겸비한 '나'가 아닌 근사한 가면을 쓴 '나'는 남들에게 멋진 사람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사람이다. 밖을 향해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내면. 안을 바라봐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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