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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Feb 11. 2019

우리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읽고 쓰기를 통해 '아름다움'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시마네현 야스기시 아다치 미술관 일본 정원 ⓒ Yongma Seo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정원의 풍경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15년 연속 일본 최고의 정원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아다치 미술관의 일본 정원의 모습은 고즈넉하고 근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술에 대해서는 무지한 나에게 그 이상의 감동은 닿지 못했다.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들은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는 순간 '이 영화 재밌다', '생각보다 별로다' 정도로 단평한다. 머리를 쥐어짜야 겨우 조금 덧붙인다. 정원을 보고 느낀 내 표현이 그랬다. 정원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말이라도 통하면 물어보고 싶었다. 같은 정원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곳에 오랜 시간 시선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작년 11월에 다녀온 일본 요나고 여행은 그렇게 물음표를 남긴 채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서 노트북 바탕화면을 정원에서 찍어온 사진으로 교체했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자주 들여다보면 뭐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매일 아침 노트북을 킬 때마다 다시 한번 아다치 미술관의 일본 정원으로 향한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화면 속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아름다운지, 어떻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무엇이 아름다운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내가 고작 있는 표현이라고는 여전히 '아름답다'에 그쳤다.



도대체 무엇이 아름다운 걸까.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궁금함이 증폭될 때쯤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는 미(美)를 다룬 두 권의 책을 접했다. 책 『심미안 수업』은 리디셀렉트를 통해 읽었고, 책 『방구석 미술관』은 종이책으로 구입해서 연달아 읽었다.『방구석 미술관』은 에드바르트 뭉크부터 바실리 칸딘스키까지 오직 미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면,『심미안 수업』은 미술, 음악, 건축, 사진, 디자인에 걸친 예술에 대해서 폭넓게 이야기한다. 


심미안 수업』에서는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아다치 미술관의 아름다움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관람객들은 정원을 직접 거닐지 못하고, 멀리서 응시하면서 관람할 수 있다. '정원인데 왜 직접 못 걷게 하지?'라는 즉흥적인 궁금함도 있었는데 책에서 마침 '일반인에게 정원을 공개하면 훼손될 위험이 있으므로 주변에 회랑을 둘렀다. 그리하여 관람객들이 밖에서 정원을 바라보게 했다. 사진의 프레임 마냥 사각의 창으로 잘려진 정원을 보는 관람객은 만든 이가 의도한 대로 반응을 느끼게 된다'라고 적혀있었다.


지극히 의도된 프레임으로 설계되다.

'사진의 프레임'처럼 액자식 구성의 아다치 미술관 일본정원 풍경 ⓒ Yongma Seo

체험은 관람을 극대화한다. 두 눈으로 보기만 하는 정원은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이상하게 아쉬움이 없었다. 아다치 미술관의 일본 정원은 '사진의 프레임'처럼 유독 액자식 구성이 많았다. 바로 밖에 있는 정원을 보고 있지만 동떨어져있는 작품을 보는 느낌이 든다. 관람객들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회랑'의 벽면을 전부 통유리로만 설계했다면 느끼지 못할 뻔했다. 설계자가 의도적으로 완성시킨 인공 정원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아다치 미술관의 일본 정원은) 지극히 인위적이다. 하지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조화는 어떤 비판도 구차하게 만든다. 완결된 아름다움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재료로 인간의 미감을 더해 완성된 공간은 황홀하다. 이상하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조화와 아름다움이 오로지 한 인간의 선택과 의지로 완결된 셈이다. ― 책 『심미안 수업』, 윤광준


돌, 수목, 모래 등으로 꾸며진 '정원'을 보는 것이 목적이다. 정원을 직접 체험했다면 오히려 '숲'이라고 할 수 있는 정원보다 정원을 꾸미는 '나무'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히려 만족도가 더 떨어질 게 분명했다.


최소한의 집을 추구하다. 

르 코르뷔지에의 오두막집 'Cabanon de Le Corbusier'

내가 짓고 싶은 집의 모델은 르 코르뷔지에가 말년에 자신이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그 집은 13.22m²(4평)가 안 되는 아주 작은 집이다. 거장의 건축에 대한 철학, 평생의 공력을 담은 설계의 깊이, 이런 걸 운운할 수도 없을 정도로 평범하고 단순한 모양의 집이다. 나 역시 이런 집을 꿈꾼다. 사는 데 그렇게 큰 집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아서다. 다만 지대가 높아서 창문에서 밖의 풍경이 온전히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드넓은 자연이 내 안마당이 되는 그런 집을 꿈꾼다. 누군가에게 어떤 집을 꿈꾸는지 물어보라. 대답을 듣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책 『심미안 수업』, 윤광준


자취를 시작하면서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다. 점점 늘어나는 짐 때문에 '집이 좁다'는 소리가 입에서 자주 나온다. 아직도 사야 할 물건이 많은데 집은 벌써부터 숨 쉴 틈이 없다. 현대 건축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는 말년에 본인이 설계한 4평짜리 오두막에서 지냈다. 현재 공간이 불만인 내 관점에서는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거장이 살기에는 너무 좁아 보였다.


[르 코르뷔지에가 말년에 살았던 네 평짜리 오두막]


말년에 르 코르뷔지에가 지냈던 집을 찬찬히 살펴보니 있을 건 다 있었다. 내심 부끄러웠다. 집이 좁은 게 아니라 짐이 많은 거였다. 다른 사람이 우겨넣은 짐도 아니었고, 내 자유의지로 하나둘 채워 넣은 짐이었다. '많은 짐'을 탓하기보다 '좁은 집'을 탓하고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지냈던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집
온돌방과 마루, 부엌만으로 이뤄진 세 칸짜리 집 '도산서당'

르 코르뷔지에가 살았던 네 평짜리 오두막처럼 문학가 소로와 대학자 이황도 최소한의 집만 추구했다. 소로가 살았던 집은 르 코르뷔지에가 살았던 오두막과 비슷한 크기였다. 그 집은 자신이 쓴 책 『월든』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을사서화에 연루되어 낙향한 퇴계 이황 선생은 1561년에 완공한 세 칸짜리 21평  '도산서당'에서 지냈다. 좀 더 넓은 공간을 지을 수 있었지만 '검소함'을 추구하는 그의 철학이 집을 지을 때도 그대로 깃들어있었다.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던 몇 년 전부터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 마음가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 계속해서 실패했는지 르 코르뷔지에의 집을 들여다보니 깨달았다. 공간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을 무분별하게 채운 게 실수였다. 내 취향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권하는 취향으로만 집을 채웠다.  


러빙 빈센트전을 다녀오다.

러빙 빈센트전 @M Contemporary Art Center


일상의 것들은 너무 익숙해서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을 잘 느끼지 못한다. 미술관에 가면 일단 거리를 두고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거리'가 확보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집중의 효과가 크다. 대상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모인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전시회 하나를 보고 나오면, 길가에 놓인 별거 아닌 조형물도 뭔가 특별해보인다. 집중해서 관찰한 에너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책 『심미안 수업』, 윤광준



 책 『심미안 수업』에서 이 문장을 읽고 M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하고 있는 러빙 빈센트전을 다녀왔다. 이미 전시회에 다녀온 친구가 영화부터 보고 가라는 말에 예전에 봤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기록을 찾아봤다. 영화를 볼 때는 큐레이터가 15분가량 해설을 해주었고, 전시회에서는 도슨트가 30~40분가량 전시물을 설명했다. 잘 모르는 분야는 그 분야의 전문가를 통해 자세히 들어봐야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 원작 2점*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그 원작만큼이나 눈길을 사로 잡았던 건 영화 속 장면과 실제 고흐의 작품을 비교해놓은 전시였다.  


*<수확하는 두 농부(앞면), 강이 있는 풍경(뒷면) 1888년경 추정> <꽃이 있는 정물화, 1886년경 추정>


 

영화를 감상한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작품 앞에 마주하니 또렷하게 기억났다. 도슨트의 설명을 쭉 듣고 나서 다시 한 번 감상하니 이해도가 훨씬 좋다. 만약 작품을 관람하러 갈 예정이라면 영화도 보고, 도슨트가 있는 평일에 갈 것을 추천한다. 평일 오전 타임이었는데도 사람이 무척 많았다. 주말이면 사람들로 바글바글할 것 같다.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면,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행동이 일어나고 생각이 바뀐다. 그러다 보면 미술관 밖에 있어도 미술관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이 자기 관점으로 미술을 감상하게 되었다는 증거다. ― 책 『심미안 수업』, 윤광준


아다치 미술관의 일본 정원을 보며 '아름다움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질문을 통해 행동이 일어났고, 생각이 바뀌었다. 5년 전 대림 미술관의 '라이언 맥긴리 사진전' 이후로 굉장히 오랜만에 전시회를 찾았다. 나를 이끌어낸 건 여행 중 문득 들었던 질문과 예술을 다룬 두 권의 책 덕분이었다.


미술은 시대마다 '주류'와 '비주류'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주류'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탄탄하게 하기 위해 전통적 관념을 유지했다. 기존의 관념을 부수는 '비주류'의 새로운 시도는 철저히 배척했다. 하지만 후대에 와서 '주류'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새로운 기법을 창조한 '비주류'의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미술은 한 곳에 고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계속 흘러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경이로움을 느끼며 잠시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미술이 흘러온 발자취처럼 지금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앞으로는 '오답'이 될 가능성이 많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정답을 좇아가는 게 아닌 매일 덜 틀린 쪽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래야만 정답에 가까워진다.    


넉넉하게 읽고 쓰는 삶을 지탱해줄 펜텔 에너겔 하이클래스(+제트스트림 0.38mm 리필심)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물건이 조화와 안정감은 물론 탁월한 미감을 주는 디자인을 갖고 있다면, 내 일상에 대한 자존감도 높아지게 마련이다. 항상 쓰는 연필, 볼펜, 만년필 같은 필기구는 디자인과 만족도가 특별하게 높아야 한다.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의 감각까지 더해지는 물건인 까닭이다. 보기에도 멋진데, 손가락에 착 감기고, 적당한 매끄러움으로 써지는 좋은 펜이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펜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끄적일 때, 그게 어떤 생각이든 다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책 『심미안 수업』, 윤광준


'비주류'의 미술가들은 처음에는 '주류'의 미술을 수용했지만 본인의 독창성을 토대로 작품을 그려내며 끊임없이 저항했다. 우리는 그들처럼 그릴 수 없으니, 읽고 쓰기를 통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한다. 읽고 쓰지 않으면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으로만 생각이 고이게 된다. 이왕이면 넉넉하게 읽고 쓰면 더 좋다. 시간이 바쁘다는 이유로 읽기를 게을리하고, 쓰기를 멀리하기보다 지금 당장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찾아 넉넉하게 읽고 써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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